본문 바로가기

대한제국의 출범 대한제국의 출범 아관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에 고종은내외의 여론과 독립협회의 자주적 제국 건설 열망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 지하실에서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어 8월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친 다음 왕을 황제라 칭하여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고, 10월 12일 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대한제국은 안으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인 자각을 바탕으로 밖으로는 조선에서 러시아 독점 세력을 견제하려는 국제적인 여론의 뒷받침을 받아 성립되었다. 대한제국의 집권층은 갑오·을미개혁의 급진성을 재검토해야만 올바른 개혁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라며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하였다. 광무 정권의 시정 원칙을 살펴보면 옛 제도를 본체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
아관파천은 무엇인가 아관파천은 무엇인가 민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하여 일본에 대한 조선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정국이 소란해졌다. 러시아의 웨베르 공사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수병 100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친러파인 이범진등은 웨베르 공사와 공모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세자를 여성용 교자에 숨겨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 갔다. 이는 차라리 유폐나 다름없었다. 국가의 상징인 왕이 남의 나라 공사관 밀실에서 유폐 생활을 하게 된것이다. 강대국과 신하들의 정권 싸움에 휘말린 왕의 운명도, 앞길을 해아릴 수 없게 되었다. 왕을 일개 정권의 상징으로밖에 보지 않은 당시의 정객들은 친일파나 친러파를 막론하고 모두 왕을 어떻게 하면 자기들 ..
침략을 전제로 한 청·일 전쟁 침략을 전제로 한 청·일 전쟁 3일 천하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우리나라에 대한 정치적 침략을 저지당한 일본은 이를 만회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조선에서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고종이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자 청국에서는 즉시 요청을 받아들여 군함과 원병을 보내는 한편,앞서 일본과 체결한 텐진 조약에 의거하여 '군사를 조선에 출동시켰다.'는 내용을 통고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일본인을 보호한다.' 구실로 대대적인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당시 동학 혁명군은 정부와의 휴전이 성립되어 전주에서 철수하게 되자 조선 정부는 청국과 일본에 '군대를 철병하라.'고 요구하였다. 동학 명군이 휴전으로 철수하였으니 애당초 원병을 요청한 때와는 정세가 달라져 원병이 주둔할 ..
야심의 경륜가 흥선 대원군 야심의 경륜가 흥선 대원군 국가의 정치가 안동 김씨의 손에 의해 농락되자 사회적 불안은 점점 심해만 갔다. 민심이 불안하면 유언비어가 떠돌기 마련이다. "관상감 안에 왕기가 서려 있다네!" 관상감이란 후에 서울 종로의 운현궁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흥선군이 살고 있었다. 흥선군의 계보를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는 남연군인데, 남연군은 능창 대군의 후손으로 정조의 동생 은언군의 아들로 들어갔다 이렇게 따져 남연군의 막내아들 흥선군과 철종과의 관계는 9촌이 된다. 흥선군은 왕실의 종친이라 하여 잠시 궁중에 출입하였으나, 기고만장하는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하기 위한 보신책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 왕손 노릇을 하였다. '상가집의 개'라는 혹참한 소리도 들었던게 이때였다. 흥선군은 묵화를 잘 하였는데, 특히 난초는..
강화 도령 철종의 등극 강화 도령 철종의 등극 양자로 대를 잇게 하자면 혈통만 동일하다 해서 아무나 입양시키는 게아니고 부자간의 항렬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동안 당파 싸움과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때문에 왕손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였기 때문이었다. 강화섬에 숨어 사는 이원범은 항렬로 따지면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이었다. 여기서 권돈인은 아주 촌수는 멀더라도, 덕흥 대원군의 종손 이하전이 총명하니 그가 뒤를 잇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맞서 안동 김씨의 의견에 동조하는 정원용은 이원범을 맞이하자고 하였다. 결국 안동 김씨의 주장대로 항렬이고 무엇이고 가릴 것 없이 강화 도령 이원범을 모셔 오기로 하였다. 총명한 사람을 왕위에 오르게 하면 자신들의 세도 정치가 위협받기에 이 같은 ..
당쟁에 휘말린 민비와 장희빈 당쟁에 휘말린 민비와 장희빈 숙종 15년에 이르러 남인들이 득세하게 되자 그들의 정권욕은 더욱 불붙었다. 서인편에 있는 왕비 민씨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중전에 앉히고자 그들은 갖은 밀모를 꾸며 숙종을 움직였다. 마침내 숙종은 민씨에게 폐비의 명령을 내렸다. "왕비 민씨는 덕이 없고 성질이 화순치 못하여, 궁에 들어온 후부터는 공공연하게 시기와 질투를 일삼았다. 특히 원자가 탄생한 후부터는 더욱 불평이 노골화되고, 조금도 회개하는 빛은 찾아볼 수 없다. 과인이 종사를 생각할 때 두려움이 앞선다. 생각컨대 이를 그대로 놓아 두면 후사에 대하여 어떠한 화를 끼칠지 마음을 놓을 날이 없으니, 종묘사직의 앞날을 위하여 폐출하노라." 이에 반대한 오두인,박태보,이세화등이 열렬히 반대하며 상소하였다. 이 상소문을..
피난 가는 선조 임금 피난 가는 선조 임금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전해진 4월 29일 밤의 이야기다. 대신들이 빈청으로 들어가 보니, 선조 임금은 초췌한 모습으로 동편채 땅바닥에 거적을 깔고 펄썩 주저앉아 있었다. 영의정 이산해가 아뢰었다. "사세가 이에 이르렀사오니, 성상께옵서 잠깐 파하시와 평양으로 납시는 게 마땅한 일로 아뢰오." 영의정에 말에 임금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어전에 부복하고 아뢰었다. "신 이항복 아뢰오. 급히 서편으로 길을 취하시와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시어 충주 이남의 땅을 회복하시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옵니다." 그제야 선조임금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갈 준비를 하느라 대궐 안에서는 밤을 꼬박 새웠다.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였..
호탕한 성종의 궁중 생활이야기 호탕한 성종의 궁중 생활이야기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승하하고 예종의 형이며, 덕종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으로 내세우니 그가 성종이다. 세조의 큰 아들인 덕종이 세자로 책봉된 후 갑자기 요절하였으므로 다음 아들 예종이 세자로 책봉된 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예종 또한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승하하니 당시 사람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인과응보로 그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했다고 했다. 성종이 즉위하자 위로 세조의 왕비윤씨를 비롯하여 생모와 양모가 살아 있어 궁중에는 세 왕지 과부가 있는 셈이었다. 어린 성종은 할머니와 두 어머니를 위하여 항상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잔치에는 노래와 춤이 따르기 마련이므로 궁중에서는 노랫소리와 장구소리가 떠날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