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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의 경륜가 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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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의 경륜가 흥선 대원군

 

 

국가의 정치가 안동 김씨의 손에 의해 농락되자 사회적 불안은 점점 심해만 갔다. 민심이 불안하면 유언비어가 떠돌기 마련이다. 

"관상감 안에 왕기가 서려 있다네!"

관상감이란 후에 서울 종로의 운현궁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흥선군이 살고 있었다. 흥선군의 계보를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는 남연군인데, 남연군은 능창 대군의 후손으로 정조의 동생 은언군의 아들로 들어갔다 이렇게 따져 남연군의 막내아들 흥선군과 철종과의 관계는 9촌이 된다. 

 

 

흥선군은 왕실의 종친이라 하여 잠시 궁중에 출입하였으나, 기고만장하는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하기 위한 보신책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 왕손 노릇을 하였다. '상가집의 개'라는 혹참한 소리도 들었던게 이때였다. 흥선군은 묵화를 잘 하였는데, 특히 난초는 아주 유명하였다. 

 

이때 궁중의 동향은 철종의 왕비 김씨가 죽고 익종의 왕비 조대비가 홀로 남아 있었다. 대비의 친정 조씨들은 전에 안동 김씨에게 밀려난 집안이었다. 대비의 조카에 조성하, 조영하, 조강하 등이 있었으나 , 20대로 아직 나이가 어려 중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철종 14년 12월 왕이 34세로 갑자기 승하하니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안동 김씨들은 철종의 후계자 문제로 갈팡질팡하였다. 이때 조성하가 조대비에게 왕의 옥새를 간수하라고 은밀히 아뢰니, 조대비는 왕의 의식이 거의 떨어질 무렵에 먼저 손을 써서 옥새를 장악하였다. 

 

 

안동 김씨로서는 그동안 미리 후계자를 정해 놓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흥선군은 그 사이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해 가면서 조성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대비 조씨에 접근하면서 자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철종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내락을 받아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흥선군의 제2자 명복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교지를 내리니 안동 김씨들로서는 청천병력이었다. "살아 있는 대원군은 둘 수 없소," 안동 김씨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만것이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고종이 되어 왕위에 올라 7백만의 조선을 다스리게 되었다. 나이가 어려 그 부친 흥선군은 대원군에 봉해지고, 이어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표면상의 수렴청정이지 흥선 대원군이 섭정왕으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흥선군은 세태를 잘 아는 사람으로 안동 김씨에 대한 정치적인 숙청은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은연중 누르는 노련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영의정으로 온후한 덕망을 갖춘 조두순을 등용하여 원만한 정치를 펴는 한편 당파를 가리지 않고 4색을 적재적소에 기용하였다. 

 

 

또한 국가의 재정을 낭비하고 당재의 온상이 되어 온 서원을 47개만 남겨놓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육전조례),(종부조례),(삼반예식),(대전회통)등을 간행하여 법에 의한 정치로 중앙집권적 정치 기강을 세웠다. 비변사를 없애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권을 분리 시켰고 세금의 법령을 고쳐 양반이나 상민들의 세금을 차별 없이 거두었다. 조세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막기 위하여 사창을 세워 백성들의 부담을 덜게 하고, 국민 생활의 안정을 기하였다. 이와 같이 대원군은 부패 정치의 일소와 서민층의 이익을 도모하는 개혁 정치를 과감히 추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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