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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에 휘말린 민비와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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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에 휘말린 민비와 장희빈

 

 

숙종 15년에 이르러 남인들이 득세하게 되자 그들의 정권욕은 더욱 불붙었다. 서인편에 있는 왕비 민씨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중전에 앉히고자 그들은 갖은 밀모를 꾸며 숙종을 움직였다. 마침내 숙종은 민씨에게 폐비의 명령을 내렸다. 

 

 

"왕비 민씨는 덕이 없고 성질이 화순치 못하여, 궁에 들어온 후부터는 공공연하게 시기와 질투를 일삼았다. 특히 원자가 탄생한 후부터는 더욱 불평이 노골화되고, 조금도 회개하는 빛은 찾아볼 수 없다. 과인이 종사를 생각할 때 두려움이 앞선다. 생각컨대 이를 그대로 놓아 두면 후사에 대하여 어떠한 화를 끼칠지 마음을 놓을 날이 없으니, 종묘사직의 앞날을 위하여 폐출하노라."

 

 

이에 반대한 오두인,박태보,이세화등이 열렬히 반대하며 상소하였다. 이 상소문을 본 숙종은 크게 노하여 상소문을 지은 박태보를 혹독한 고문으로 치죄하였다. 

 

단근질의 화상이 악화되어 박태보가 죽고 왕비까지 쫓겨나 서인 세력은 몰락을 거듭했다. 왕자를 낳아 세자로 책봉시킨 어머니 장씨가 정식으로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미천했던 장씨의 친정은 경사가 거듭 겹치게 되었다. 

 

이미 죽은 장씨의 아버지 장현에게 옥산부원군의 봉작이 내려지고, 어머니 윤씨에게는 파산부부인의 작위가 주어졌다. 미모의 딸을 낳은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러나 중궁에 오른 장씨의 호화스러운 생활도 6년 후인 숙종 20년에 이르러 깨지고 말았다. 

 

서인의 김춘택,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하다가 남인에 의해 고발되었다. 당시 남인의 영수격인 우의정 민암 등은 대옥사를 일으켜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숙종은 폐비 민씨에 대하여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해 사형시키고 권대운,목내신,김덕원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소론의 남구만,박세채,윤지왕 등을 등용하였다. 한편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다시 중전으로 복위 시켰다. 죽은 송시열,김수항 등은 복작이 되고, 남인들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엎치락뒤치락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심한 파도가 일었다. 어제의 집권자가 오늘은 역적으로 몰리어 죽고, 어제의 역적이 오늘은 권좌에 오르니 정국은 편안한 날이 없었다. 

 

한편 서인을 몰아내기 직전에 오히려 결정타를 얻어맞아 남인이 몰락하고, 자기도 희빈으로 강봉된 데 불만을 품은 장희빈이 동생 장희재와 연락하며 민비를 해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조정에서는 논쟁을 벌인 끝에 장희재를 중벌로 다스리려 하였으나, 남구만,유지완 등 소론의 거두들이 세자에게 해가 미칠까 염려한 나머지 관대한 처분을 내려 귀양보내는데 그쳤다.

 

숙종 27년 왕비 민씨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희빈 장씨는 또다시 중전 자리에 오를 망상에 사로잡혔다. 왕비가 빨리 죽으면 자기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망상에 부푼 장씨는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꾸며놓고 민비를 저주하는 요망한 짓을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희빈 장씨의 방에서 시중드는 나인들을 잡아다가 친국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희빈 장씨와 장희재가 사사되고, 관련된 궁인,무당들이 모두 화를 당했다. 장희재가 왕비 민씨를 해치려고 한 음모 사건 때 관대한 처분을 내리게 한 소론 일파도 숙청 되었다. 정권은 노론에게로 넘어갔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조정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경종이 그동안 정치적 싸움에 시달려 성적인 불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억측은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을 때 음낭을 잡아뜯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그러나 이 같은 추축은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튼 경종의 성불구는 궁중에서의 미묘한 시기와 질투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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