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탕한 성종의 궁중 생활이야기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승하하고 예종의 형이며, 덕종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으로 내세우니 그가 성종이다.
세조의 큰 아들인 덕종이 세자로 책봉된 후 갑자기 요절하였으므로 다음 아들 예종이 세자로 책봉된 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예종 또한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승하하니 당시 사람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인과응보로 그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했다고 했다.
성종이 즉위하자 위로 세조의 왕비윤씨를 비롯하여 생모와 양모가 살아 있어 궁중에는 세 왕지 과부가 있는 셈이었다. 어린 성종은 할머니와 두 어머니를 위하여 항상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잔치에는 노래와 춤이 따르기 마련이므로 궁중에서는 노랫소리와 장구소리가 떠날 날이 없었다.
성종이 나이가 들자 궁녀들은 왕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은근히 교태를 부렸다. 성종은 술도 잘하고 풍류가 기질이 있어 술에 취하면 선비를 아낄줄도 알고 유머도 곧잘 하였다.
세종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는 풍조가 이어져 내려와 성종도 학문을 좋아하였으므로 세조 때 폐지되었던 집현전을 다시 부활시켜 홍문관이라 칭하였다.
왕은 문신들에게 명하여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을 편찬하였고, 나라의 기강이 되는 (경국대전)도 이때 완성되었다.
어느 날 구종직이 처음으로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의 벼슬에 올라 경복궁 안에서 숙직하게 되었다. 시골 사람이 처음 서울에 올라 온지라 마침 시간도 한가해서 경회루 구경을 나갔다가 왕의 행차를 만나게 되었다. 어명 없이는 들어오지 못하는 곳에서 왕의 행차와 마주치자 구종직은 자리에 엎드려 대죄를 하였다.
왕은 앞에 엎드린 사람을 보고 말했다.
"너는 누구길래 그렇게 하고 있느냐?"
"신은 시골의 천한 몸이옵니다."
"경회루 경치가 좋다 하기에 구경하러 들어왔습니다."
"네 벼슬이 무엇이냐?"
"교서관 정자 구종직으로 아뢰옵니다."
"그럼 노래를 할 줄 아느냐?"
"격양가를 조금 부를 줄 아오나 장단이 맞지 않을까 하옵니다."
"그래도 불러 보아라."
구종직은 하는 수 없이 농부들이 부르는 격양가를 멋드러지게 불렀다.
왕은 매우 흡족해 하였다. 다음날로 왕이 구종직의 벼슬을 일약 부교리로 승격시키니 삼사에서는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그러나 왕은 끝내 듣지 않고 그를 부교리로 임명하였다.
성종은 재주도 있고 글을 좋아하여 선비들을 아낄 줄 알았으며 여러 가지 좋은 서적도 편찬하였으나 주색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30여 세의 젊은 나이인데도 피를 토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