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을 전제로 한 청·일 전쟁
3일 천하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우리나라에 대한 정치적 침략을 저지당한 일본은 이를 만회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조선에서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고종이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자 청국에서는 즉시 요청을 받아들여 군함과 원병을 보내는 한편,앞서 일본과 체결한 텐진 조약에 의거하여 '군사를 조선에 출동시켰다.'는 내용을 통고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일본인을 보호한다.' 구실로 대대적인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당시 동학 혁명군은 정부와의 휴전이 성립되어 전주에서 철수하게 되자 조선 정부는 청국과 일본에 '군대를 철병하라.'고 요구하였다. 동학 명군이 휴전으로 철수하였으니 애당초 원병을 요청한 때와는 정세가 달라져 원병이 주둔할 필요가 없으니 철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청나라에 조선의 내정에 공동 관여하여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청이 이를 거절하자 단독으로 내정 개혁을 선언하고, 병력을 더욱 증파하여 서울과 인천에 주둔시키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주둔지에서 위협적인 시위를 벌여 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은 개화당 친일파들이 암약하였다. 정권을 잡으려고 일본과 접촉을 벌여 그들의 침략 야욕을 부채질한 것이다.
일본공사는 6월 21일 새벽 일본군 2개 대대의 병력을 인솔하고 궁중으로 난입하여 왕에게 배알하고, 10시에는 대원군을 모셔 들어왔다. "그동안 올바른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왕은 이같은 이유로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정치를 대원군에게 위임하였다. 일본군의 세력에 의해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민씨 정권도 일본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민씨 정권을 몰아낸 일본군은 7월 25일 남양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에게 포격을 가하여 해전을 벌였다. 이로써 침략을 전제로 한 청,일 전쟁의 막을 열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 군함이 피해를 입어 청국군 900여 명이 숨졌다. 전쟁은 의외로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의 육군은 성환 전투와 평양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요동을 공격했고, 일본 해군은 아산만과 서해에서 청국 해군을 격파하였으며 여순과 위해위에서는 육군과 해군이 합동작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이에 힘의 열세를 느낀 청국에서는 화의할 것을 제기해,1895년 4월 17일 마침내 화의가 설립되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위치를 확고히 굳혔으며, 승전의 대가로 청국으로부터 요동 반도, 대만, 팽호 열도 등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하관 조약이 체결된 지 일주일도 못되어 러시아,프랑스,독일 등3국이 요동 반도의 할양을 중지시켰다. 당시 일본은 힘의 열세를 깨닫고, 3국의 굴복하여 요동 반도를 내주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본격화되고,뒤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