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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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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출범

 

 

 

아관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에 고종은내외의 여론과 독립협회의 자주적 제국 건설 열망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 지하실에서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어 8월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친 다음 왕을 황제라 칭하여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고, 10월 12일 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대한제국은 안으로는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인 자각을 바탕으로 밖으로는 조선에서 러시아 독점 세력을 견제하려는 국제적인 여론의 뒷받침을 받아 성립되었다. 

 

대한제국의 집권층은 갑오·을미개혁의 급진성을 재검토해야만 올바른 개혁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라며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하였다. 광무 정권의 시정 원칙을 살펴보면 옛 제도를 본체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신참이었다. 이 원칙은 정치면에서 전제 황권의 강화로 구체화되고 이러한 복고적 정책은 입헌 군주제와 의회 설립을 주장하는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운동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1899년에 제정한 대한국제는, 대한제국이 전제 정치 국가임을 나타낸다. 통수권·입법권·행정권·사법권·외교권등을 모두 황제의 대권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은 경제면에서 양전사업과 상공업 진흥책을 전개해나갔다. 국가적인 사업인 양전 사업은 과거의 누적된 폐단의 하나인 전정을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국가 재정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 양전 사업으로 최초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라 할 수 있는 지계가 발급되었다. 

 

정부의 상공업 진흥책이 실시되어 섬유,철도,운수,광업,제지,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각지에서 설립되었다. 상공업 진흥책에 따라 실업 교육이 강조되었고, 근대 산업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생이 파견되었으며 각종의 실업학교 와 기술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다. 이어 교통, 통신, 전기, 사회사업, 의료등 각 분야에 걸친 근대적 시설이 도시를 중심으로 서서히 다른 지역에까지 확충되어 갔다. 

 

당시 대한제국으로서는 새롭게 고친것이 많았다. 우선 왕후의 호칭은 황후로, 왕세자는 황태자로, 대원군은 대원왕으로 승격하여 부르게 하였다. 

 

 

신하들은 황제를 부를 때는 폐하로, 황태자에게는 전하라는 존칭을 쓰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수립과 함께 정부에서는,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의 고조에 힘입어 서울에 무관학교를 새로 설립하고, 근대식 군사훈련을 통한 국방 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또 국어와 국사교육을 강화하여 민족문화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근대식 교육을 보급하는 한편 유학생의 해외 파견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입헌적 전제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다. 

 

대한제국의 경제, 교육, 시설면에서 이루어진 근대화 시책은 실제적으로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대한 제국의 집권층은 진보적 정치개혁 운동을 탄압하여 국민적 결속을 이루지 못하였고 외국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자체의 힘이 없었으므로 결국 일제에 강점당하는 비운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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