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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나폴레옹의 등장 영웅 나폴레옹의 등장 혁명의 혼란으로 사회의 질서 체제가 파괴되면 국민의 인기를 얻은, 야망을 품은 군인이 권력을 잡을 기회가 많아진다. 시대의 아들 나폴레옹도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아마 역사상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프랑스의 식민지인 코르시카 섬 출신의 키작은 군인으로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식민지 출신의 한 군인이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기반으로 성공하여 혁명의 소요를 진정시키며 혁명의 성과를 집대성하게 만들었다. 프랑스를 증오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나폴레옹은 부모로부터 힘을 키워서 코르시카 섬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포병장교로 훈련받았다. 본래 나폴레옹은 고향인 코르시카가 섬이므로 해군장교가 되고자 하였지만 해군..
손기정, 일장기를 달고 뛰다 손기정, 일장기를 달고 뛰다 육군대신 출신인 미나미 지로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것은 1936년 8월 26일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중책은 조선을 완전한 전시체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부임할 무렵 골치 아픈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곧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1936년 8월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대표로 나간 손기정이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고 남승룡은 3위로 입상했다. 두 선수는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시장대에 섰다. 이 소식은 외신으로 들어오자 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두 선수의 입상은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고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
역사를 바꿔놓은 9·11 테러 사건 역사를 바꿔놓은 9 ·11 테러 사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후세인은 미국의 경고와 유엔 결의에도 최후통첩 시한인 1991년 1월 17일까지 쿠웨이트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은 1월 17일부터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대대적인 공중 폭격과 걸프 지역에 배치된 최첨단 함정에서 미사일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제 1차 이라크 전쟁은 제2차 전쟁가는 달리 대부분의 공격이 공중 폭격으로 이뤄졌다.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은 하루 평균 2천 회, 30초에 한 번꼴로 39일 동안 대규모 공중 폭격을 했다. 지상전은 단 4일 만에 끝냈다.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은 제대로 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단번에 물러나고 말았다. 걸프전은 아주 짧은 기간에 미국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3·1 혁명 후 일본의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대표 핵심 기관이 필요하다고 느낀 애국지사들은 각처에서 하나둘 국제 도시 상해로 모여들었다. 미국,중국,러시아 등지에서 나라를 찾으려고 망명 생활을 하던 이동녕 등은,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합의하여,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김신부로 22호에서 먼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다. 이 의정원에 각도대의원 29명이 회합하여 10개조로 된 임시헌장을 채택, 발표하고, 13일쯤 선포하였다. 이어 17일에는 임시정부 부서를 발표했다. 그 외에도 임시정부는 국내외에 6~8개가 설립될 찰나에 있었다. 당시의 각료로는 임시 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법무총장..
도시락폭탄과 윤봉길 의사 도시락폭탄과 윤봉길 의사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상해 홍구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 안에서는 천장절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했고 상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가졌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도시락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물통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대한제국의 최후 대한제국의 최후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어 통감이 내정을 간섭하고, 각부에는 일본인 차관을 두어 차관통치를 강행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군대를 완전 해산시켰다. 이때 한국의 군대는 서울과 지방을 합쳐 1만 명 내외에 불과했다. 이들 군졸들은 숫자적으로도 적었지만 군기가 문란하고 사기가 떨어져 방위 능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군대 해산 후 경찰권과 사법권이 통감부로 넘어가니 한국은 완전히 허수아비 정권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완용 내각에 상공부 대신·내부대신을 지낸 일진회의 송병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국권피탈의 상주문·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를 자행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제 자기들의 계획을 아무 거리낌 없이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쓰..
원천 무효, 을사 조약 원천 무효 을사조약 러시아,미국,영국 등 강대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백권을 승인받은 일본은 일진회 등 친일단체를 조직 포섭하여 을사 조약의 필요성을 여론화였다. 한편 이 조약의 체결을 위해 이토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들 일행은 군대로 궁궐을 포위하고,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에 조인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등 몇몇 대신은 완강히 조인을 거부했으나, 박제순, 이제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등 다섯 명의 대신이 조약체결에 찬성함으로써 1905년 11월 17일 을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을사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통리 지휘 한다. 2. 차후로는 한국 정부가 일본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국제적 조..
헤이그 특사 헤이그 특사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2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한국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특사의 파견을 결심하였다. 이회영,이동녕이 건의하여 특사 파견이 검토되었다. 처음에는 이상설,이준,이위종 외에 김좌진 등 2명이 더 선발되었다가 앞의 3명으로 결정되었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고종의 신임장과 친서를 받아 이준과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를 거쳐 러시아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주재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이위종을 만나 세 사람이 평화회의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이위종은 프랑스어에 능통하였으므로 동행하였다. 이들 일행은 회담을 개최되기 며칠 전에 도착하여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위원으로서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