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꿔놓은 9 ·11 테러 사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후세인은 미국의 경고와 유엔 결의에도 최후통첩 시한인 1991년 1월 17일까지 쿠웨이트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은 1월 17일부터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대대적인 공중 폭격과 걸프 지역에 배치된 최첨단 함정에서 미사일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제 1차 이라크 전쟁은 제2차 전쟁가는 달리 대부분의 공격이 공중 폭격으로 이뤄졌다.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은 하루 평균 2천 회, 30초에 한 번꼴로 39일 동안 대규모 공중 폭격을 했다. 지상전은 단 4일 만에 끝냈다.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은 제대로 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단번에 물러나고 말았다.
걸프전은 아주 짧은 기간에 미국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이라크 국민에게는 실질적인 전쟁이 남아 있었다. 걸프전이 끝났지만, 이라크 국민에게는 실질적인 전쟁이 남아 있었다. 걸프전이 끝난 뒤 미국과 유엔은 이라크에 경제 제재를 가하는 한편, 남북에 각 각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하고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한 감시 등 이라크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후 이라크 국민은 10년 이상 계속되는 경제 봉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경제 봉쇄의 피해는 고스란히 어린이와 노인 등 노약자에게 돌아갔다. 이라크 국민은 미군이 사용한 열화우라늄탄의 피해에도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 결과 이라크 국민은 평상시의 수십 배를 넘는 기형아 출산과 암을 비롯한 온갖 질병들에 시달려야 했다. 지뢰와 폭팔물로 인한 피해도 속출했다. 이라크 국민의 입장에서는 총성은 멎었으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라크 국민은 미국의 경제제재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건재했다. 그의 권좌는 더욱 튼튼해졌고, 쿠르드 족에 대한 학살과 인권 탄압도 계속되었다. 한편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미국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한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었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후세인 정권에 대해 계속적인 압박을 가했지만 더 이상 무력 공격은 감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 부시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라크에 위기가 닥쳐왔다. 강경파들이 장악한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이라크를 강하게 압박했으며, 언제라도 다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와중에 역사의 방향을 바꿔 놓을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테러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민간 항공기가 폭판이 되어 20분 간격으로 쌍둥이 빌딩에 돌진했고, 40분 후에는 워싱턴 국방성 건물마저 테러 공격을 받았다.
세계무역센터는 공격을 받은 지 1시간 30분쯤 지나 완전히 무너졌으며, 국방성 건물 일부도 부서졌다. 이날의 테러 공격으로 뉴욕 중심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미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 사람들이 이 광경을 TV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하여 폭발하는 모습,불을 피해 창가에 매달려 구조를 기다리다가 수백 미터 아래로 연이어 추락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마침내 엄청난 먼지를 내뿜으며 수천 명의 시민을 안은 채 무역센터 건물이 붕괴되는 모습 등이 전 세계에 곧바로 중계되었다.
이 같은 9·11 테러로 3천여 명의 미국인이 희생되었다. 9·11테러는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부시 대통령은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희생자들에 애도를 표하는 한편,테러리스트들을 끝까지 추적, 응징 하겠다고 다짐했다. 미국 정부는 곧 테러의 배후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를 지목했다.
부시 대통령은 사건 다음 날 백악관에서 가진 두 번째 대국민 연설에서 이 사건을 '전쟁행위'라고 규정하고, "사악한 행위의 배후자들과 이들을 보호하는 어떠한 국가에 대해서도 보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의회도 대통령을 즉각 지원했다. 테러 공격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는 결의안을 하원은 408 대 0, 상원은 100 대 0 으로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