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나폴레옹의 등장
혁명의 혼란으로 사회의 질서 체제가 파괴되면 국민의 인기를 얻은, 야망을 품은 군인이 권력을 잡을 기회가 많아진다. 시대의 아들 나폴레옹도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아마 역사상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프랑스의 식민지인 코르시카 섬 출신의 키작은 군인으로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식민지 출신의 한 군인이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기반으로 성공하여 혁명의 소요를 진정시키며 혁명의 성과를 집대성하게 만들었다.
프랑스를 증오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나폴레옹은 부모로부터 힘을 키워서 코르시카 섬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포병장교로 훈련받았다. 본래 나폴레옹은 고향인 코르시카가 섬이므로 해군장교가 되고자 하였지만 해군장교는 특권 신분의 자제만 될 수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육군 장교가 되었고, 그나마 병과도 포병을 선택해야 했다.
보병과 기병장교는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에게만 허용되었으므로 시민층이나 식민지 출신의 사관생도들에게는 그나마 포병이 조금 나은 병과였다.
젊은 장교 나폴레옹은 가난에 지쳐서 때로는 삶을 포기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서 봉건적인 폐습이 그 종말을 고하고, 능력에 따라 인간의 성공이 결정된다는 사회풍조가 확대됨에 따라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고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더욱이 혁명을 부정하는 왕당파나 반혁명의 외세가 프랑스를 압박하자 나폴레옹은 그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툴롱 항구의 전투와 파리 폭동을 진압하여 영국과 왕당파를 퀘멸시키자 국민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치솟았고 약관 27세에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의 전투도 신기한 전술로 많은 곤경을 극복하고 승리하였다. 그 결과 체결된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서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양국은 벨기에와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 양도하였다.
이탈리아 원정 등지의 싸움에서 나폴레옹은 '작은 하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사령관인 그는 전투에서 늘 앞장서서 공격을 지휘하고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 애칭 역시 보통 병사와의 친밀감의 표시이자 그의 군대의 단결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폴레옹은 장군의 직위에서 제1통령을 거쳐 황제가 되는데 5년을 소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오직 쿠데타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1799년 8월 이집트 원정에서 비밀리에 프랑스로 귀국한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 영국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위협을 가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 몰락 이후 숨어 지내던 자코뱅파가 총재 정부를 협박하는 어수선한 국내정세를 틈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1799년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 동안은 나폴레옹이 실권을 장악 하느냐 또는 반란의 두목이 되느냐의 갈림길이었다. 나폴레옹의 측근은 무력을 동원하면 쿠데타가 손쉽게 성공할 것을 알았으나, 유독 나폴레옹은 무력행사의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그는 총검으로 권좌에 오른 사람은 같은 총검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다는 역사의 경험을 예견했다. 거사의 성패가 달린 쿠데타의 인준을 위해 그가 근위대와 함께 의회에 들어오는 순간 "불법행위다! 독재자를 타도하자."라고 외치는 수많은 의원이 그를 향하여 몰아쳐왔다.
나폴레옹은 순간 당황 하였고 근위대조차 의원들을 체포할 것인지 머뭇거렸다. 이때 의장이 "의사진행을 문란케 하는 의원은 군대로 제지할 수 있다." 는 권한을 내세워 군대의 진입을 요청함으로써 나폴레옹을 도왔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근위대로 하여금 의원들을 의사당에서 축출하였다. 이리하여 쿠데타는 성공하였고 총재 정부를 대신하여 3인의 통령 정부가 수립되었다.
시에예스, 뒤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3인의 통령이었으나 국민은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 기억하였다. 아무도 새로운 정부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