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최후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어 통감이 내정을 간섭하고, 각부에는 일본인 차관을 두어 차관통치를 강행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군대를 완전 해산시켰다.
이때 한국의 군대는 서울과 지방을 합쳐 1만 명 내외에 불과했다. 이들 군졸들은 숫자적으로도 적었지만 군기가 문란하고 사기가 떨어져 방위 능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군대 해산 후 경찰권과 사법권이 통감부로 넘어가니 한국은 완전히 허수아비 정권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완용 내각에 상공부 대신·내부대신을 지낸 일진회의 송병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국권피탈의 상주문·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를 자행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제 자기들의 계획을 아무 거리낌 없이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쓰러져 가는 대한제국은 대항할 힘조차 없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 지방에서 유생들의 상소문이 빗발치듯 올라왔으나 이젠 그럴 기력도 없었다. 그 대신 시세에 영합하는 무리들이 진고개 통감부로 눈치껏 출입하면서 이권을 챙기고 출세의 바람을 일으키는 등 악질적인 친일파 무리들만 늘어갔다.
융희 4년(1910) 5월 일본의 육군대신 데라우치가 통감으로 부임함과 동시에, 2개 사단의 군대를 한국에 배치하였고, 한국 주재 일본 헌병대도 새로 편성하였다. 일본인 헌병과 헌병보조원 2만 2천명을 채용해서 한국에 있어서의 군사,경찰권을 통감 밑에 두고, 직접 지휘하여 항일 운동을 진압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조치였다.
1910년 8년 22일 일본은 이완용과 한국 강점의 조약을 맺고, 그 다음날 외국에 통고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일주일간 발표를 하지 않고 눈치를 살피다가 무장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8월 29일에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이 조약은 전문 8개조로 되어 있는데, 한국에 대한 일제 통치권을 영원히 일본에게 양도할 것과 한국의 황제 및 황족과 정부 요인에게는 상당한 대우와 세비를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이래 27대 519년 만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전날 고려가 망할 때는 많은 충신들이 두문동으로 들어가 끝까지 충절을 지켜 고려의 망국을 슬퍼했지만, 대한제국 강점 때는 76명의 새로운 귀족이 생겨 모두 작위를 받고 세비와 상금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에게 나라를 팔고, 그 대가로 말이다. 당시 정부의 고관으로서, 국록을 먹던 자로서 누구 한 사람 국가와 운명을 같이한 사람이 없었으니 너무나 쓸쓸하고 어이없는 망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