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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일장기를 달고 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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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일장기를 달고 뛰다

 

 

 

손기정

 

 

 

육군대신 출신인 미나미 지로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것은 1936년 8월 26일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중책은 조선을 완전한 전시체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부임할 무렵 골치 아픈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곧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1936년 8월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대표로 나간 손기정이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고 남승룡은 3위로 입상했다. 두 선수는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시장대에 섰다. 이 소식은 외신으로 들어오자 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두 선수의 입상은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고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게재했다. 조선중앙일보는 사장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일장기를 삭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히 동아일보는 사회부의 이길용, 사진부의 신낙균 기자가 회사 간부진의 지시도 없이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일장기를 말소했던 것이다. 

 

두 신문사의 관련자는 경찰에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동아일보의 경우 위의 두 기자 등 8명이 구속되었고 사장 송진우,주필 김준연 등이 물러났으며 8월 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이 내려졌다. 또 조선중앙일보의 사장 여운형은 총독부의 서슬에 신문을 계속 발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진휴간 했다. 

 

신문들은 더욱 위축 되었고 친일보도의 경향도 나타났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3일자로 복간되지 못했다. 언론통제가 시작된다는 신호탄이었다. 미나미 총독은 전임총독이 준비한 대로 먼저 두 가지 일에 착수했다. 불온문서를 철저히 단속하고 사상범을 보호, 관찰하는 법령을 공포했으며 사상범을 감시하기 위해 서울을 비롯한 평양, 광주 등 주요 도시에 7개의 보호관찰소를 설치했다.

 

기존의 치안 유지법 또는 경찰기구만으로는 사상범을 효과적으로 감시,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족주의계열이든 사회주의계열이든 운동가들은 행동의 제약을 받아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졌다. 

 

미나미 총독의 임무는 중일전쟁 도발을 염두에 두어 조선을 전시체제로 개편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부임후 임무를 차근차근 진행시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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