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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삼별초의 난 삼별초란 최씨 정권의 최우가 집권하고 있을 때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 밤 도둑을 순찰, 단속하는 임무를 맡기고 야별초라 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로도 전국적으로 도둑이 일어나자 기구를 확대하여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골과 항전하던 중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온 자들을 모아 신의군을 조직하여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삼별초라 하였다. 이들은 최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병이었으나 경찰, 전투등 공적 임무도 수행하였으므로 공적인 군대에 준한다 하겠다. 1232년 몽골의 침략을 피하여 최씨 정권이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몽골과의 항정은 이 삼별초군에 의해 강행되었다. 1259년 고려의 태자 전이 부왕 고종을 대신하여 몽골에 입조한 것을 계기로 고려 조정은 출륙문제, 즉 개성..
문예 부흥을 일으킨 정조 문예 부흥을 일으킨 정조 영조의 보령(임금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이 80에 이르자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안이 영의정으로 있었고, 동생인 홍인한 또한 정승 자리에 있어 홍씨들이 득세하였다. 일찍이 홍인한은 사도세자를 죽일때 사도세자를 비호하지 않고, 영조편을 들어 사도세자를 죽게 한 인물로 세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관계로 세손에게 양위하여 대리청정케 하는 것도 홍인한은 적극 반대하였다. 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세손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얼마 안 되어 홍인한과 정후겸 등 사도세자의 참사 때 동조한 인물들을 모두 유배형에 처했다가 마침내 사사하여 아버지의 원한을 풀었다. 그 후 정조는 정치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홍국영에게 ..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 영조는 자기 어머니 최씨의 신분이 미천하였기 때문에, 일찌구터 양반을 백안시하였다. 반면 일반 백성을 잘다스려 보겠다는 정치적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는 이러한 정치적 이념을 펴기위해 먼저 세종조,세조조 때 출간한 서적을 다시 만들고,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삼강행실도),(숙종보감),(농가집성),(소학훈의),(동국문헌비고) 등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을 만들어 펴냈다. 그 밖에 현재 실시하고 있는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 영조는 압슬형등을 개정하고, 나장법 등은 폐지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이때에 만들어진 균역법은 역대에 처음 시도된 영단이었다. 원래 국민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대개 양반계급에 있는..
용의 후손 태조 왕건 용의 후손 태조 왕건 고려 태조 왕건은 개성 근처 예성강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왕륭인데 지방의 호족으로 덕망이 있었다. 소년 왕건은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예성강에서 수군 훈련을 많이 받았다. 왕건이 20세가 되었을 때에는 궁예의 세력이 강성해져 개성 부근까지 그 위용을 떨치게 되었다. 이때 왕건은 아버지 왕륭과 함께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궁예의 부하가 된 왕건은 그 부근의 땅을 점령하여 궁예의 신임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우선 장군이란 신분이 되어 개성과 정주를 차지하였다. 이어 광주, 청주, 충주 등 을 점령하였으며 27세 때에는 금성을 공격하러 나갔다. 금성을 육로로 내려가 치는 것이 아니고 수군으로 공략을 하게 되니 어려서부터 예성강에서 닦은 수전의 실력을 ..
고구려 정신을 계승한 대조영 고구려 정신을 계승한 대조영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10년 동안은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요동 지역에서 당나라에 항거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당나라는 고구려가 망한 뒤 10여만 명을 생포하여 영주에 집결시켜 이곳을 이질종족 통솔지로 삼았었다.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삼아 친당적인 소고구려국을 수립한 일도 있었다. 이는 고구려 유민에 대한 당나라의 무자비한 이민정책이었다. 이때 영주에 있던 거란이 반란을 일으켜 이곳을 점령하였다. 따라서 7세기 말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대조영장군은 거란 세력을 몰아내고 그 무리와 말갈족의 일부를 거느리고 옛 땅인 동모산을 근거로 698년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의 맥을 잇는 정통국가인 발해였다. 처음엔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 이라 칭하였..
선덕여왕의 세 가지 지혜 선덕영왕의 세 가지 지혜 제27대 선덕여왕은 진평대왕과 마야부인의 딸이다. 정관 6년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다. 선덕여왕은 매우 총명하여 보통사람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능히 해결하는 능력이 있었다. 선덕여왕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알아차린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당나라 태종이 진홍색, 자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 그림과 그 씨앗 석 되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선덕여왕이 그림을 보고는 뜰에 꽃씨를 심도록 하였다. "이 꽃은 보기에 아름다우나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싹이 자라 꽃이 피고 꽃이 질 때를 기다렸더니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군신들이 이상히 여기며 왕에게 물었다. "어떻게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습니까?" "꽃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신라 시조의 성은 박씨요,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4월에 왕위에 오르니 명칭은 거서간이고 나이는 13세였다. 혁거세의 탄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한에는 여러 백성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1은 알천의 양산촌이고, 2는 돌산의 고허촌이고, 3은 취산의 진지촌이고, 4는 무산의 대수촌이고, 5는 금산의 가리촌이고, 6은 명활산의 고야촌이다. 이것을 진한의 6부라고 말한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옆의 수풀 사이에서 말이 엎드려 울고 있음을 이상히 여겨 그 말이 우는 곳으로 달려가니 말은 어디론가 달아나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알을 깨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소벌공은 기쁨을 이..
백제의 시조 온조왕 백조의 시조 온자왕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다. 주몽이 처음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왔을 때 부여왕에겐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주몽의 아내로 주었다. 이 부인의 몸에서 큰 아들 비류와 둘째 아들 온조가 태어났다. 그러던 중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찾아와 태자 자리에 오르자 비류와 온조는 오간 마려등 10여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으로 내려오니 그를 따라오는 백성이 많았다. 이들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하남땅에 이르러 말하였다. "여기는 북으로 한수에 접하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의거하고 남으로는 기름진 평양를 바라보고 있으니 도읍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