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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클로저 운동 인클로저 운동 "양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모어는 농경지가 없어지고 양을 키우는 목장이 들어서면서 농민들이 내쫓기는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인클로저는 '둘러싸기' '울타리 두르기'를 의미한다. 16세기 영국에는 봉건 영주들이 소유지에서 농사를 짓는 대신 농민들을 토지에서 강제로 몰아내고 너나 할 것 없이 목축업에 뛰어들었다. 농사를 짓는 것보다 양을 길러서 양털을 뽑아내어 당시 최대 산업인 모직물 공업의 원료로 팔아넘기는 편이 더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대로 농사를 짓고 정착해 살던 농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신세가 된 이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농민 반란을 일으키며 이러한 흐름에 저항했다. 사태가 심각..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 서유럽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직접 갈 수 있는 뱃길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는 바람만 제대로 분다면 며칠 안에 인도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유럽에서 인도로 가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는 거대한 대륙을 우회해야 한다는 점을 묵과했다. 콜럼버스의 꿈을 실현한이는 바로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였다. 포르투갈은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한 인도 항로 덕분에 무역강국으로 입지를 다졌고, 훗날 숱한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 앞서 나갈 수 있었다.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이용한 항로에 관심이 많았다. 1488년 바르톨로메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역시 마누엘 1세의 지원 덕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1497년 리스본을 출발했다. 그..
서로마 제국의 멸망 서로마 제국의 멸망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는 속담이 있다. 기원전 8세기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세운 로마가 공화정과 제정을 거쳐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500년이 넘는 역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찬란한 제국이 둘로 쪼개지고, 그중 한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뉜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일반적으로 크리스트 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긴 시점을 비잔티움 제국의 시발점으로 여기지만,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그의 두 아들이 로마를 동과 서로 나누었을 때가 제국이 분리된 시점이라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을 맡은 이가 테..
밀비우스 다리 전투 밀비우스 다리 전투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있다. 눈부시게 발전하던 로마 제국도 3세기 이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문제는 권력 투쟁이었다. 서기 235년부터 284년까지 50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가 26명에 이를 정도로 왕위 찬탈이 끊이지 않았다. 주로 군인들의 쿠데타에 의해 황제가 쫓겨나거나 살해당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군인 황제 시대'라고도 부른다. 284년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혼란스러운 제국에 다소간의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내놓았다. 황제의 수를 늘린 것이다. 황제 두 명에 부황제 두 명을 더해 로마는 모두 네 명의 황제가 나누어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다. 여럿에게 자리를 나누어 주니 옥좌를 놓고 벌이는 이전투구는 줄어들었지만, 최고 권력자가 여러 명이라는 ..
칸나이 전투 칸나이 전투 "세상의 모든 전술가는 '칸나이'를 꿈꾼다."라는 말이 있다. 칸나이 전투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수적 열세에도 뛰어난 전술로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이탈리아 남부 칸나이에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 5만 명이 운집했다. 한니발은 해상로를 통해 이탈리아를 공격할 것이라는 로마의 관측을 일축하며 알프스 산맥을 넘어왔다. 혼비 백산한 로마 군은 황급히 대군을 편성했다. 8만 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이 로마 군의 깃발 아래 모였다. 반면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4만 명에 기병은 1만 명 남짓이었다. 더구나 그의 군대는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느라 전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로마 원로원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
실크로드에 대해서 실크로드에 대해서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에서 로마까지의 동서양 교역로를 말한다. 주로 비단을 교역하였다 하여 '비단길'이라는 뜻의 실크로드로 불리지만, 꼭 비단만을 싣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도자기, 향료 , 차 ,황금 ,보석 , 거울, 약재 등 셀수 없이 많은 물품들이 낙타나 말의 등에 실려 이 기나긴 모랫길을 오갔다. 물품만 오간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오가고, 문화가 오갔다.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 교 , 조로 아스터 교를 비롯한 종교들도 이 길을 통해 건너왔다. 천문학, 지리학, 수학도 이 길을 타고 전파되었다. 중국에서는 나침반, 인쇄술, 화약 이 유럽으로 건너갔다. 실크로드는 동서 간 문명 교류의 대동맥이었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했지만, 길의 ..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라는 당한 만큼 갚아 준다는 보복법의 구절은 기원전 1705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역사상 가장 오랜된 성문법으로 꼽혔던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 문명을 꽃피웠던 바빌론 왕조의 함무라비 왕이 만든 이 법전은 현재까지도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바빌론은 기원전 4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간쯤에 수메르 인이 세운 도시 국가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2350년 셈 족인 아카드 인의 사르곤 1세가 통일 국가를 세운 후 수메르의 문화는 셈 족에게 동화되면서 오리엔트의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사르곤 1세의 무력 통치로 통일된 메소포타미아 제국은 그의 사후 바로 분열되었다. 이후 ..
영어로 된 최고의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 영어로 된 최고의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 영어로 쓰인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오랜된 것은 무엇일까? 장편 영웅서사시 (베오울프)가 영문으로 기록된 최초의 작품이자 현존하는 영문학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고대 문학이 그러 하듯이 (베오울프)는 구술로 전승되어 오다 8세기경 문자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의 작품으로는 믿을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시의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처음 문자로 기록한 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총 3,182행으로 되어 있는 (베오울프)는 2부로 나뉜다. 배경은 6세기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다. 1부는 괴물 그렌델이 덴마크 왕국에 쳐들어와 용사들을 납치해 잔인하게 살해하고 횡포를 부리면서 시작된다. 이에 바다 건너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