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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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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

 

 

서유럽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직접 갈 수 있는 뱃길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는 바람만 제대로 분다면 며칠 안에 인도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유럽에서 인도로 가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는 거대한 대륙을 우회해야 한다는 점을 묵과했다. 콜럼버스의 꿈을 실현한이는 바로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였다. 

 

 

포르투갈은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한 인도 항로 덕분에 무역강국으로 입지를 다졌고, 훗날 숱한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 앞서 나갈 수 있었다.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이용한 항로에 관심이 많았다. 1488년 바르톨로메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역시 마누엘 1세의 지원 덕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1497년 리스본을 출발했다. 그는 서아프리카 남쪽의 시에라리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했는데, 이는 당시의 항해술로는 혁명에 가까웠다. 결국 바스코 다 가마는 11월에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이듬해 4월 케냐 마린디에 도착했다. 

 

 

다 가마 일행이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것은 한 달이나 더 지난 5월 20일의 일이었다. 그는 향신료를 수입할 권한을 얻어 같은 해 10월 귀국길에 올랐고, 1499년 9월 리스본에 도착했다. 선대부터 시작되어 70년이나 걸린 포르투갈의 숙원 사업이 이룩된 것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포루투갈이 해상왕국으로 발돋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인도의 이슬람 상인을 학살하고 얻어낸 독점 무역을 바탕으로 포르투갈은 16세기 17세기동안 막대한 부를 누렸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에서 '공공의 적'으로 인식된다.

1998년 포르투갈 정부와 인도 정부가 공동으로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 발견500주년 행사를 추진한다 그만두어야 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럽 인의 입장에서 바스코 다 가마는 귀한 향신료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신항로를 개척한 선구자지만 인도,나아가 동양인의 시각에서 그는 유럽의 식민 지배의 토대를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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