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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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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의 멸망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는 속담이 있다. 기원전 8세기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세운 로마가 공화정과 제정을 거쳐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500년이 넘는 역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찬란한 제국이 둘로 쪼개지고, 그중 한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뉜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일반적으로 크리스트 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긴 시점을 비잔티움 제국의 시발점으로 여기지만,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그의 두 아들이 로마를 동과 서로 나누었을 때가 제국이 분리된 시점이라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을 맡은 이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남 아르카디우스다. 그는 실질적인 정권을 재상과 환관,외척에게 맡겼다.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서로마 제국은 호노리우스가 맡았다. 당시 불과 열한 살의 어린 소년이던 황제 대신 호노리우스의 장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장군이 정권을 휘두르게 되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보다 국력이 약했다. 70년 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 즉 콘스탄티노플에 제2의 수도를 세운 후부터 제국의 중심이 동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이다. 

 

스틸리코는 게르만 족과 서고트 족의 침략을 몇 번이나 물리치면서 서로마 제국을 지켰다. 그러던 중 408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죽었다. 스틸리코는 이 기회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대파들은 그가 아들 에우케리우스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고 한다고 맞섰다. 

 

 

결국 스틸리코는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호노리우스는 2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스틸리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서로마 제국은 더 극심한 혼란기로 접어 들었다. 

 

서로마 제국은 외세의 침입에 쉽게 무너졌다. 바다 건너 브리튼 섬에는 앵글로 색슨 족이, 갈리아에는 프랑크 족이 쳐들어왔다. 에스파냐 역시 위태로웠으니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자연스럽게 축소된 셈이었다. 410년에는 제국의 중심이 되어야 할 로마 도심마저 서고트 족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451년 아에티우스 장군이 서고트의 테오도리쿠스와 연합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훈 족을 돌리는 듯했다. 

 

하지만 4년 후 게르만 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로마를 침략해 서로마는 게르만 족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게르만 족이었다.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는 원래 서로마의 안테미우스 황제의 친위군이었다. 하지만 장군 리키메르가 안테미우스 황제를 없애려고 하자 오도아케르가 말을 갈아탔다. 리키메르의 세상에서 오도아케르는 곧 실권을 잡는 것처럼 보였지만 리키메르는 후계자로 최고 군사령관인 오레스테스를 점찍어 두고 있었다. 

 

새 황제로는 오레스테스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이미 낙점된 상태였다. 오도아케르는 이 어린 황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같은 부족 출신의 용병을 모아 '대장'을 자칭한 뒤 476년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로물루스를 폐위시켰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오도아케르는 그 이후로도 13년 동안 '이탈리아왕'으로서 옛 서로마 지역을 다스렸다. 하지만 493년 비잔티움 제국의 사주를 받은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에게 붙잡혀 살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이처럼 황망하게 막을 내린 데 반해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비잔티움 제국이 서로마보다 경제적,문화적으로 활력이 있었고 통치 기구도 제대로 갖춰져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의 정통성을 유지하며 천 년 넘게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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