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밀비우스 다리 전투

반응형

밀비우스 다리 전투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있다. 눈부시게 발전하던 로마 제국도 3세기 이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문제는 권력 투쟁이었다. 서기 235년부터 284년까지 50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가 26명에 이를 정도로 왕위 찬탈이 끊이지 않았다. 주로 군인들의 쿠데타에 의해 황제가 쫓겨나거나 살해당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군인 황제 시대'라고도 부른다. 

 

284년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혼란스러운 제국에 다소간의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내놓았다. 황제의 수를 늘린 것이다. 황제 두 명에 부황제 두 명을 더해 로마는 모두 네 명의 황제가 나누어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다. 여럿에게 자리를 나누어 주니 옥좌를 놓고 벌이는 이전투구는 줄어들었지만, 최고 권력자가 여러 명이라는 제도 자체가 모순이었다. 

 

 

이미 봉책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제들은 '하늘 아래 유일한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시 패권 다툼을 벌였다. 

 

이 황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였다. 로마 정벌에 나선 그는 라이벌 막센티우스와 최후의 결전을 남겨 두고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벌이는 불리한 일전이었지만, 그는 밀비우스 다리에서 적군을 기적적으로 무찌르고 서로마를 통일했다. 그리고 324년 로마 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황제 리키니우스마저 쳐부수면서 그는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역사는 콘스탄티누스의 밀비우스 전투 승리를 십자가의 계시 덕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투를 앞둔 서기 312년 10월 28일 저녁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의 석양 위로 빛나는 십자가를 보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십자가에는 "이것을 가지고 정복을 끝내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다음 날 군인들의 방패에 이 십자가의 문양을 그려 출전하도록 했고,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 승리 이후로 콘스탄티누스가 집권하면서 크리스트 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종지부를 찍었다. 밀비우스 전투는 로마 역사, 나아가 유럽사 전체에서 콘스탄티누스가 패했다면 병든 제국 로마는 일찌감치 쪼개져 극심한 혼란을 겪거나 멸망을 수백년 앞당겼을 터이고, 크리스트 교의 공인도 훨씬 늦추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