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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 이란-이라크 전쟁 때 이라크 대통령이던 사담 후세인은 골치 아프고 위험한 이라크 정계의 최상층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다. 그는 1937년에 바그다드에서 100마일 정도 떨어진 티그리트 근방에서 수니파 부족 아우자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후세인의 가족은 매우 가난했고, 그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죽어서 외삼촌 아래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서 훌륭한 자질을 보고 그를 '맞서는 자'라는 뜻의 '사담'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했다.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후세인의 인생은 '대결'의 연속이었다. 그는 열 살 때 삼촌과 함께 살기위해 바그다드로 가서 바트당에 가입했다. 바트당은 이슬람 신앙보다는 경제적 현대화에 바탕을 둔 범아랍주의를 지지했고, 부유한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이..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소련군 보리스 그로모프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소련군 보리스 그로모프 보리스 그로모프는 1987~1989년에 아프가니스탄의 소련 제 40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길고 힘겨운 전쟁에서 소련이 바라던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었다. 영리하고 용감하며, 공격적이면서 재치가 넘치고, 심지어 인간미까지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로모프는 1943년 소련에서 태어나 사관학교와 장교학교에 다녔고, 그 후에는 출세가도를 달려 모스크바의 명망 높은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소련군에서도 고속으로 승진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에는 장군 직위에 있었다. 그는 어느 지역에서 싸우든 무자헤딘을 밀어냈다. 그로모프의 작전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87년 11월의 마지스트랄 작전으로, 몇 년간 무..
판즈쉬르의 사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 판즈쉬르의 사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아마드 샤 마수드는 1953년 아프가니스탄의 판즈쉬르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그곳 출신답게 그는 사랑하는 조국을 침공한 소련 침입자들과 싸우며 판즈쉬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마수드는 경찰서장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랐고 교육도 잘받아서 여러 가지 언어를 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에 카불 대학에 들어간 마수드는 당시 많은 무슬림 청년이 그랬듯 전통 이슬람 교리에 흠뻑 빠졌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반대하는 이슬람 학생 모임에 가입했다. 1975년, 마수등는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 3년 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함마드 다우드 칸에 대한 반란에 참여했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마수드는 값진 경험을 얻고 고향인 판즈쉬르 주에서 게릴라 조직..
제복을 입은 기업인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제복을 입은 기업인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남베트남 주재 미국 원조 사령부 지휘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성실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미국이 역사상 최악의 비정규전을 벌일 때, 이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1914년에 태어난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1953년에 준장이 되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병사들의 복지에 깊이 신경 쓰면서도 허튼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상관이었다. 장교 이력으로는 독특하게도 하버드 경영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그영향인지 사령부도 기업체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믿었다. 베트남전 전문 역사학자 스탠리 카노는 그를 '제복을 입은 기업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국방성의 요직과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후 1964년에 미군의 지휘권을..
이스라엘의 건국자 다비드 벤구리온 이스라엘의 건국자 다비드 벤구리온 이스라엘이 새로운 나라로 탄생하는 데는 뛰어난 지도자들의 공헌이 있었다. 그중에 첫손에 꼽아야하는 인물이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다. 벤구리온은 1886년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시온 운동을 깊이 신봉하는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벤구리온 역시 이 믿음을 따랐으며, 폴란드에서 벌어진 유대 인 학살을 보면서 그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벤구리온은 덩치는 작았지만, 열성적이고 카리스마 있었으며, 다소 권위적이고 설교하기를 좋아했다. 1906년, 많은 시온주의자가 그랬듯이 벤구리온도 당시 오스만 제국 일부였던 팔레스타인에 이민했다. 그는 농장 노동자이자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나, 평생의 꿈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915년에 그는 정치 활..
행운의 사나이 아돌프 히틀러 행운의 사나이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살아남지 말았어야 했다. 두 번이나 부상을 당한 제 1차 세계 대전 때 참호에서 죽든,1939~1945년 사이에 17차례나 시도된 암살로 총에 맞아 죽든 폭탄에 맞아 죽든, 어떤 식으로든 죽었어야 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한 것인지, 운명인지, 우주의 신비로운 기운 때문인지는 알수 없으나, 어쨌든 히틀러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나이였다. 반대로 그와 마주친 사람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세관 검사원 알로이스 시클그루버의 아들로 태어났다. 히틀러에게 유대계 조부모가 있었다는 소문은 연합군 선전가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알로이스는 자신의 성이 촌스럽다고 느껴 히틀러로 바꾸었다. 어린 시절 아돌프는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며 자..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 베니토 무솔리니는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군화에 주먹을 휘두르며 거친 후두음으로 연설하는 파시스트의 전형으로 종종 묘사된다. 이런 면에서 언제나 히틀러보다 한 수 아래로 꼽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무솔리니 1883년 이탈리아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대장장이였던 아버지는 열광적인 사회주의자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아버지처럼 어린 베니토 역시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일자리를 찾아 스위스에 이민했을 때 받은 열악한 대우 때문에 사회주의에 관한 정치적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그는 몇 년 후, 빈에서의 히틀러처럼 부랑자 신세로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다 추방당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사회주의 신문의 편집자 겸 노동당 지도자가 되었다. ..
자기 패를 과신한 이소로쿠 야마모토 자기 패를 과신한 이소로쿠 야마모토 태평양 전쟁을 이야기할 때, 일본 해군 제독 이소로쿠 야마모토만큼 논쟁거리가 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초반, 일본이 동남아시아, 동인도, 필리핀, 중부 태평양 제도 대부분을 점령했을 때, 야마모토는 일본 해군의 방향타였다. 그런가 하면 일본이 최악의 패배를 당한 미드웨이 해전 때에도 총사령관이었다. 세간에서는 그가 자기 자신과 나라의 전략적 자원의 한계를 넘었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야마모토는 눈에 띄는 이력을 갖추고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884년에 태어난 그는 해군 사관학교를 나와, 러시아-일본 전쟁에 참전했다가 쓰시마 해전에서 부상을 당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1년간 하버드 대학에 다녔고, 다시 1년을 워싱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