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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을 입은 기업인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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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을 입은 기업인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남베트남 주재 미국 원조 사령부 지휘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성실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미국이 역사상 최악의 비정규전을 벌일 때, 이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1914년에 태어난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1953년에 준장이 되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병사들의 복지에 깊이 신경 쓰면서도 허튼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상관이었다. 장교 이력으로는 독특하게도 하버드 경영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그영향인지 사령부도 기업체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믿었다. 

베트남전 전문 역사학자 스탠리 카노는 그를 '제복을 입은 기업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국방성의 요직과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후 1964년에 미군의 지휘권을 받고 베트남에 도착했다. 그는 이 전쟁이 정규전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베트남의 정규군을 상대로 치밀한 전략을 구상해 전투를 벌였다. 동시에 미군이 소모전을 벌일 동안 남베트남 군대가 베트콩 게릴라와 싸워 '전략적 마을'을 사수하기를 바랐다. 

 

어쨌든 웨스트모얼랜드가 북베트남군 병사 수십만 명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속도와 박자를 통제하지 못했고, 북베트남군은 대게 정규전을 회피했기 때문에 미군의 공세에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북베트남군이 마침내 설날 대공세로 치고 나왔을 때, 웨스트모얼랜드의 부대가 그들을 격파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미국에서의 반응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다. 그 무렵부터 미국 여론이 전쟁에 질려 버린 것이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잡기 어려운 적을 구석에 몰아넣기 위해 언제나 우세한 병력을 이용했다. 그때까지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은 50만명에 달했는데, 웨스트모얼랜드는 본국에 계속 추가 병력을 요청했고, 설날 대공세 이후에는 20만명을 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의 요청을 거부했고, 그는 1968년 봄에 육군 참모 총장이 되어 베트남을 떠났다. 

 

당시 수많은 참모부 장교가 그랬듯이 웨스트모얼랜드 역시 20년 묵은 전략에 바탕을 두고 전투를 벌였다. 훨씬 변화무쌍하고 결연한 적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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