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패를 과신한 이소로쿠 야마모토
태평양 전쟁을 이야기할 때, 일본 해군 제독 이소로쿠 야마모토만큼 논쟁거리가 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초반, 일본이 동남아시아, 동인도, 필리핀, 중부 태평양 제도 대부분을 점령했을 때, 야마모토는 일본 해군의 방향타였다. 그런가 하면 일본이 최악의 패배를 당한 미드웨이 해전 때에도 총사령관이었다.
세간에서는 그가 자기 자신과 나라의 전략적 자원의 한계를 넘었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야마모토는 눈에 띄는 이력을 갖추고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884년에 태어난 그는 해군 사관학교를 나와, 러시아-일본 전쟁에 참전했다가 쓰시마 해전에서 부상을 당했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1년간 하버드 대학에 다녔고, 다시 1년을 워싱턴의 일본 대사관에서 복무하며 미국인에 관한 이해도를 높였다. 그가 보기에 미국인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장기간의 전투를 버틸 지구력이 있는지는 의심스러웠다.
다시 1년을 워싱턴의 일본 대사관에서 복무하며 미국인에 관한 이해도를 높였다. 그가 보기에 미국인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장기간의 전투를 버틸 지구력이 있는지는 의심스러웠다.
야마모토는 1930년대에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미국 전략가들처럼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는 해군의 제공력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 내 전통주의자들은 전함을 먼 미래형 함선으로 여길 뿐, 실전에 투입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야마토는 전통주의자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야마모토가 세운 전략에 따라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이 진행되었다. 그는 이 공격으로 미국이 전투력을 잃으면 더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면 일본이 동남아시아에서 작전을 계속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날 미국의 항공모함이 항구에 없었던 덕분에 미국은 치명사을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미국은 야마모토의 예상과 달리 매우 격렬하게 반격을 펼쳤다.
진주만 공격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지만, 일본은 여전히 태평양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은 미군에 접근을 허용하면서, 방어전으로 일관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미군이 일본에 가까이 갈수록 그들의 보급로가 대양을 건너 수천 마일로 길게 늘어지므로, 일본으로 서는 그다지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야마모토는 미국 시절에 포코를 배우면서, 좋은 패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강하게 배팅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미드웨이에서 미국 해군을 상대로 함정을 팠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군이 그의 항공모함을 먼저 발견해 파괴하는 바람에 그가 판 함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1943년 4월, 미군 도청단은 야마모토의 개인 비행기가 일본이 점유한 부겐빌 섬을 방문한다는 전신을 가로챘다. 곧 미군 전투기 편대는 프랭클린 D.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야마모토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일본 제독의 비행기를 격추했고, 야마모토는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