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즈쉬르의 사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아마드 샤 마수드는 1953년 아프가니스탄의 판즈쉬르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그곳 출신답게 그는 사랑하는 조국을 침공한 소련 침입자들과 싸우며 판즈쉬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마수드는 경찰서장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랐고 교육도 잘받아서 여러 가지 언어를 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에 카불 대학에 들어간 마수드는 당시 많은 무슬림 청년이 그랬듯 전통 이슬람 교리에 흠뻑 빠졌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반대하는 이슬람 학생 모임에 가입했다.
1975년, 마수등는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 3년 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함마드 다우드 칸에 대한 반란에 참여했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마수드는 값진 경험을 얻고 고향인 판즈쉬르 주에서 게릴라 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벌어진 내전에서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과 맞서 싸운 덜 과격한 이슬람 집단들과 동맹을 맺었다.
소련군이 침공했을 때 마수드는 이미 소규모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마수드는 점점 미국인의 호의를 얻는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과격한 성전주의자보다 다른 신앙에 관한 포용력이 휠씬 넓었다.
마수드는 판즈쉬르에서 소련군의 기나긴 공세와 대규모 폭격에 맞서 중대한 승리를 얻어내기 시작했다. 한 번은 폭격이 너무 거세서 골짜기의 거주민 3만 명을 모두 피신 시켜야 할 때도 있었다.
마수드는 '판즈쉬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고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무자헤딘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83년,3년간 소련군과 싸운 후에 그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는 일시적인 휴전이었으나, 다른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은 마수드가 소련의 압박에 굴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마수드는 1만 3,000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했다. 소련이 철수한 후 그는 탈레반과 내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의 원조도 끊긴 탓에, 1990년대 초에 이르자 탈레반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 90퍼센트를 차지했다.
곧 마수드는 탈레반 정권과 오사마 빈라덴 같은 과격파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저항하는 '북부 동맹'의 지도자가 되었다. 2001년 9월 9일, 미국에 9.11테러 공격이 가해지기 이틀 전에 미수드는 기자 2명과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이 기자들은 알카에다 요원이었던 것으로 추청된다.
둘 중 한 사람이 비디오카메라에 폭탄을 설치해 마수드와 함께 사망했다.
많은 첩보기관은 오사마 빈라덴이 탈레반의 호의를 얻기 위해 마수드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그 사건 후 탈레반은 분노한 미국으로부터 빈라덴을 보호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