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문예 부흥을 일으킨 정조

반응형

문예 부흥을 일으킨 정조

 

 

영조의 보령(임금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이 80에 이르자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안이 영의정으로 있었고, 동생인 홍인한 또한 정승 자리에 있어 홍씨들이 득세하였다. 

 

일찍이 홍인한은 사도세자를 죽일때 사도세자를 비호하지 않고, 영조편을 들어 사도세자를 죽게 한 인물로 세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관계로 세손에게 양위하여 대리청정케 하는 것도 홍인한은 적극 반대하였다.

 

 

정조

 

 

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세손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얼마 안 되어 홍인한과 정후겸 등 사도세자의 참사 때 동조한 인물들을 모두 유배형에 처했다가 마침내 사사하여 아버지의 원한을 풀었다. 

 

그 후 정조는 정치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홍국영에게 모든 정치를 일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의 횡포가 너무 지나쳐 마침내 홍국영을 내쫓고, 홍씨의 세도 정치를 무너 뜨렸다. 

 

정조는 당파 싸움의 피해를 잘 아는지라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 나갔다. 인사의 형평을 기하기 위하여 숙종 이후 실각되었던 남인들 등용하고, 서북인들을 골고루 기용하였다.

 

 

규장각

 

 

총명한 왕은 학문의 진흥에도 관심을 기울여 학문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왕실 연구 기관으로 규장각을 만들어 선왕의 문장과 유서 ,교서,등의 저술을 수장하고, 중국의 서적이나 우리나라의 서적을 많이 수집하여 도서관 같은 것을 만들었다. 

 

정조는 원래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였으므로 서적의 편찬에 힘을 기울여 (국조보감),(홍재전서),(무예도보통지),(추관지),(대전통편)등을 편찬하였다. 그는 재위 24년간 오직 학문으로 세월을 보냈다. 영조 52년과 정조 24년을 합한 76년간은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다. 

 

임금 자신이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였다. 특히 이때는 청나라의 전성기로서 고증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새로운 학풍으로 자리 잡았다. 

 

양반 계급을 우선으로 하던 정책을 버리고, 일반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펼쳤다. 쌀값이 오르면 국가에서 저장했던 곡식을 국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서민계급의 생활 안정에 주력하여 국민들의 생활이 많이 향상되어 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