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신라 시조의 성은 박씨요,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4월에 왕위에 오르니 명칭은 거서간이고 나이는 13세였다. 혁거세의 탄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한에는 여러 백성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1은 알천의 양산촌이고, 2는 돌산의 고허촌이고, 3은 취산의 진지촌이고, 4는 무산의 대수촌이고, 5는 금산의 가리촌이고, 6은 명활산의 고야촌이다. 이것을 진한의 6부라고 말한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옆의 수풀 사이에서 말이 엎드려 울고 있음을 이상히 여겨 그 말이 우는 곳으로 달려가니 말은 어디론가 달아나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알을 깨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소벌공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
아이는 크면서 점차 기골이 장대하고 숙성하여 비범한 재질이 있으므로 6촌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던 중 13세가 되던 해에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진한 사람들은 호를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이란 말의 뜻은 진한 말로 임금이란 뜻이다.
제3대 유리왕 5년에 왕이 국내를 순시했을 때 한 할머니가 춥고 배고파 쓰러져 죽게 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왕은 또 아랫사람에게 명하여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 늙은이, 병자 가운데 자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모두 나라에서 먹을 것을 대주도록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웃나라 백성들 중 옮겨오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때에 백성들이 편안하고 풍년이 들어 비로소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이는 왕의 선정을 기리고 백성들의 편안함을 내용으로 한 노래로 바로 우리나라 정형시의 시초이다. 집단적 서사시와 개인적 서사시의 중간 형식이며 이로써 민요가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유리왕 9년 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이후 6부의 여성을 두 편으로 갈라 왕녀 두 사람이 각각 한 편씩 거느리고 7월 16일부터 날마다 대부의 뜰에 모여 밤늦게까지 길쌈을 하다가 8월15일에 길쌈 성적을 매겨 진 쪽에게 사례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에는 노래와 춤 그리고 온갖 놀이가 벌어져 즐겁게 놀았다. 이것이 가배이다. 이때 진 쪽의 여성이 나와 춤추고 탄식하며 회소회소(모이라는 뜻) 라고 하는데 그 소리가 애절하고 청아하였다. 후대인들이 이를 토대로 노래를 짓고 이것을 회소곡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