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정신을 계승한 대조영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10년 동안은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요동 지역에서 당나라에 항거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당나라는 고구려가 망한 뒤 10여만 명을 생포하여 영주에 집결시켜 이곳을 이질종족 통솔지로 삼았었다.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삼아 친당적인 소고구려국을 수립한 일도 있었다.
이는 고구려 유민에 대한 당나라의 무자비한 이민정책이었다. 이때 영주에 있던 거란이 반란을 일으켜 이곳을 점령하였다. 따라서 7세기 말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대조영장군은 거란 세력을 몰아내고 그 무리와 말갈족의 일부를 거느리고 옛 땅인 동모산을 근거로 698년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의 맥을 잇는 정통국가인 발해였다.
처음엔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 이라 칭하였다. 이로써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함께 존재한 남북국 시대가 열였다. 발해는 친고구려적인 성격의 나라인 만큼 고구려 정신을 계승,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당에 항거하였으나 그 뒤에 차차 교류하였다. 그러나 신라와는 시종일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신라도 발해에 대해서 마찬가지였다.
대조영은 걸걸중상의 아들로 당나라에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저항하는 삶을 살아왔다. 결국 그 덕분에 고구려 계승과 발해국 건설이 구체화되었다고 말할수도 있겠다.
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한 뒤 돌궐족과 손잡고 당을 견제할 세력을 튼튼히 구축했다. 마침내 705년 당나라가 시어사 장행급을 보내 화해를 청하였다.
이에 대조영은 답례로 아들 대문예를 파견해 당나라에 입시하도록 해 평화가 계속되었다. 발해가 당나라의 제도의 영향을 받아 문물을 발전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후 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에 봉해지고 국호를 '발해'라고 고친뒤 옛 땅을 거의 회복하여 해동성국을 이룩하였다. 대조영은 죽음에 이르러 "후대 왕들은 고구려 정신을 잊지 말고 잘 계승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발해는 동삼성과 연해주 일대를 차지하는 큰 나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