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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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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삼별초란 최씨 정권의 최우가 집권하고 있을 때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 밤 도둑을 순찰, 단속하는 임무를 맡기고 야별초라 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로도 전국적으로 도둑이 일어나자 기구를 확대하여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골과 항전하던 중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온 자들을 모아 신의군을 조직하여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삼별초라 하였다. 

 

이들은 최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병이었으나 경찰, 전투등 공적 임무도 수행하였으므로 공적인 군대에 준한다 하겠다. 1232년 몽골의 침략을 피하여 최씨 정권이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몽골과의 항정은 이 삼별초군에 의해 강행되었다. 

 

 

1259년 고려의 태자 전이 부왕 고종을 대신하여 몽골에 입조한 것을 계기로 고려 조정은 출륙문제, 즉 개성으로 천도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다.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천도를 희망하였고, 무신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만약 천도를 한다면 이는 몽골에 완전히 굴복하는 일이니 결사 반대한다." 무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천도가 단행되자 삼별초의 지휘관 배중손은 왕족인 승화후 온 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그들의 반란을 반몽골 반정부의 자주, 독립 수호 운동으로 제고 하였다. 새로 왕을 세우고 관부를 설치한 삼별초는 강화도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하였다. 그저 도내의 인심이 동요했을 뿐이다. 문무관 중에 탈출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몽골군의 반격이 있을 것도 우려되었다. 

 

배중손은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 고관의 가족들과 공사, 재물을 싣고 진도로 향하였는데 이때 동원된 선박이 1천여 척이나 되었다. 진도로 이동한 삼별초는 그곳에 강력한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해상권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해전에 미숙한 몽골군을 압도할 계획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삼별초는 거제,탐라등을 비롯한 30여 도시를 세력권 안에 넣어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1270년 고려 조정은 김방경을 전라도 초토사에 임명하여 삼별초를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몽골의 원수 아해도 동해하였다. 고려, 몽골, 연합군은 몇 차례 진도를 공격하였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271년 5월 홍다구가 몽골군 지휘관이 되고 김방경, 흔도의 지휘하에 고려,몽골 연합군의 진도에 대한 총공격이 다시 감행되었다.

 

 

삼별초군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전력의 열세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왕으로 옹립되었던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은 전사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힌 자가 1만명이나 되었다고 하는 주로 인질로 잡힌 귀족, 고관의 가족이 많았다. 

삼별초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삼별초는 김통정을 수령으로 받들어 탐라로 본거지를 옮겨 항전을 계속하였다.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들은 1272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지를 기습하는 등 큰 피해를 주었다. 11월에는 안남도호부를 공격하여 부사와 그의 처를 납치하는가 하면 합포(마산)을 공격하여 전함을 불태웠다. 또한 남도의 세미를 운송하는 동중에 약탈해 큰 피해를 주었다. 이처럼 삼별초는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나 한번 기울어진 대세는 만회할 수 없었다. 

 

1273년 2월 김방경, 흔도, 홍다구는 병선 160척에 1만 명의 수륙군을 거느리고 탐라의 삼별초를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수령 김통정은 산중으로 피신하였다가 죽고 나머지 1,300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삼별초의 난은 약 3년만에 완전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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