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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시대의 개막 에니악 개발 컴퓨터 시대의 개막 에니악 개발 1946년 2월 15일 저녁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한 실험실에 2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미국 최고의 과학자들과 국방성 고위 관리들, 기자들이었다. 이들의 관심은 실험실 안을 가득 메운 한 대의 기계에 쏠려 있었다. 높이 5.5미터, 길이 30미터, 무게가 30톤에 이르는 거대한 기계였다.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130킬로미터 길이의 전선들로 연결된 1만 8,800개의 진공관이 깜빡거리며 분주히 연산 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실험실 밖에 서 있는 가로등이 순간 꺼졌다. 다시 켜졌다. "아!" 곧이어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이 풀어도 7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포의 탄도 계산 문제를 이 괴물 같은 기계가 겨우 3초 만에 풀어냈기 때문이었..
지혜로 차지한 중국 대륙 한고조 유방 지혜로 차지한 중국 대륙 한고조 유방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통일국가로 후세 모든 중국 국가들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한나라를 세운 사람은 놀랍게도 평민 출신인 유방이었다. 유방은 패(沛) 나라 출신으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가사를 돌보지 않고 이런저런 유협의 무리들과 교우했다. 장년이 되어서야 사상 지방의 정장(정이라 불리던 숙소의 관리와 치안을 담당)이라는 말단 관리가 되었다. 하지만 여산의 황제릉 공사에 부역하는 인부들을 호송하던 중 도망자가 속출하며 임무 수행이 어려워지자 나머지 인부들을 풀어주고 자신도 도망쳐서 산중에 은거했다. 진나라 말기 ,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했는데, 당시 유방도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들고 군사를 일으켜 패공이라 칭했다. 다음 ..
대만의 역사 대만의 역사 예전부터 대만에는 남방중국계, 동남 아시아계 민족이 이주해서 살았다. 대만이 역사서의 기록에 나타난 시기는 3세기의 삼국 시대로, 7세기의 수나라 역사서에는 '유구국'이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대만을 지칭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구국'은 오키나와를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유구는 현재 오키나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옛날에는 오키나와에서 대만까지의 넓은 범위를 포함해 유구를 비롯한 도우쇼 섬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었다. 실제로 오키나와인들과 대만인들의 왕래는 빈번해서 대만과 오키나와는 경제적으로 하나의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만이 중국 영토의 일부라는 생각은 적어도 고대 중세에는 없었다. 13세기, 원나라 때에 대만은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원에 복속되었다. 명나라 때는 왜구가 대만을..
날조된 폭군, 수나라 양제 날조된 폭군, 수나라 양제 수나라 2대 황제인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화북과 강남을 물길로 연결했다. 이 대운하는 남북이 정치적으로 통합되었을 뿐 아니라,경제적으로도 통합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상징이었다. 폭군으로 유명한 양제는 대운하 완성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운하 건설에 고생한 백성을 치하하기는커녕 호화로운 뱃놀이를 즐겼다는 등 대단히 오만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과장된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쿠데타로 수나라의 정권을 탈취한 당나라에 의해 날조되었다고 의심이 된다. 양제는 대운하 건설을 비롯해 율령제라고 부르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정비하여 국력 증대에 힘썼고 또한 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향상시켰다. 더불어 양제시대에 균전제를 실시함으로써, 부유한 호족이 소유한 대토지를 몰수해 백성에게..
빈민에게 주어진 역전의 기회, 페르시아 전쟁 빈민에게 주어진 역전의 기회,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7세기, 오리엔트 최초의 통일 국가인 아시리아가 붕괴하고, 기원전 6세기에는 소아시아의 아나트리아 반도에 인도·유럽계 국가인 리디아 왕국이 세워졌다. 리디아 왕국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주조화폐가 만들어졌는데, 이 화폐는 금은 합금으로 주조되었다. 그 전까지는 거래가 원시적 형태인 물물교환이었지요. 화폐가 출현함으로써 신용 거래가 가능해졌고, 질적이나 양적으로 거래의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기반이 튼튼한 시장 시스템이 만들어집니다. 리디아 왕국의 화폐경제는 그리스에게 해 지역 일대에도 영향을 끼치면서 대규모 화폐경제권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동시에 그리스 지역으로 인도·유럽계 백인 이민이 급증하면서 그리스는 화폐경제의 확장을 등에 업고 교역을..
교황은 누구이며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교황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장이자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의 후계자이다. 베드로가 로마에 와서 교회를 세웠다. 당시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로마 교회는 신자들의 열성으로 성장했다. 로마 제국이 4세기에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로마 교회의 지위가 확립되면서 그 수장인 교황의 지위도 널리 인식되었다. 로마 교회의 교황이 사도인 베드로부터 이어진다는 특별한 유래가 있기에 교황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가 된다. 5세기 중반의 교황 레오 1세는 '내말은 베드로의 말'이라고 언급하며 예수·사도의 대리인을 자청했다. 교황의 지위는 역대로 계승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로마 교황의 권위가 높아지자 동쪽의 비잔틴 제국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로마 교황도 강대한 비잔틴 제국에 대항하려고 앞서 말한 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30초. 태평양 비행기지를 출발한 미국의 B29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지름 71센티미터, 길이 3.05미터, 무게 약 4톤의 리틀보이가 떨어진 순간, 오렌지색 섬광이 번뜩이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도시의 60퍼센트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반경 500미터 이내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즉사했다. 에놀라 게이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종사 중 한 사람은 "오, 하느님,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라고 중얼거렸다. 이날 사망한 히로시마 시민은 7만 8,000명. 부상당한 사람과 행방불명된 사람은 5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방사능 후유증 등으로 앓다가 죽은 이들까지..
나폴레옹 제국과 몰락 나폴레옹 제국과 몰락 나폴레옹이 뛰어난 전술가였다는 것은 모두가 납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술을 훌륭히 사용하여 많은 싸움에서 승리 하였다. 그의 전술의 특징은 우선 수비전을 포기하고 공격을 중시한 점에 있다. 공격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신념이 전술의 전부였다. 따라서 문제는 어떠한 공격이 효과적인 것인가를 분석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전격전이야말로 상대의 기를 꺽고, 소수의 불리한 군사적 상황으로 다수의 유리한 적을 격멸할 수 있는 공격의 요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신속한 군대의 분산과 집결, 이동 등이 결정적인 관건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전술보다도 우선 적으로 중시한 것이 있었다. 병사의 사기, 즉 싸우면 이긴다는 정신력은 나폴레옹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승리의 묘약이었다. 그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