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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제국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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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제국과 몰락

 

 

나폴레옹이 뛰어난 전술가였다는 것은 모두가 납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술을 훌륭히 사용하여 많은 싸움에서 승리 하였다. 그의 전술의 특징은 우선 수비전을 포기하고 공격을 중시한 점에 있다. 공격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신념이 전술의 전부였다. 

 

 

따라서 문제는 어떠한 공격이 효과적인 것인가를 분석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전격전이야말로 상대의 기를 꺽고, 소수의 불리한 군사적 상황으로 다수의 유리한 적을 격멸할 수 있는 공격의 요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신속한 군대의 분산과 집결, 이동 등이 결정적인 관건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전술보다도 우선 적으로 중시한 것이 있었다. 병사의 사기, 즉 싸우면 이긴다는 정신력은 나폴레옹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승리의 묘약이었다. 그 자신이 뛰어난 가문에서 특권을 가지고 성장하지 못하였으므로 일반 병사의 관리에 특히 애정을 가졌고, 이는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전술과 병사의 사기를 발판으로 전 유럽을 정복하며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확산시키고 프랑스와 그 자신의 영광을 높였다. 

 

1806년 프러시아를 궤멸시키며 중부 유럽을 순식간에 정복한 동시에 북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만들며 러시아를 압박한 그는 영국을 제외하고 에스파냐, 스웨덴까지 복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정복한 지역마다 프랑스 이념을 전파하여 정복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헤겔은 말 위에 올라탄 나폴레옹을 '세기의 정신을 구현한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그는 어느 의미로는 정복자가 아니라, 구제도의 모순에 아직 신음하는 이웃을 해방시킨 해방자로서 생각되었고 이것이 그의 승전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한편 영국은 집요하게 나폴레옹에게 저항하였고 막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육지에서의 싸움이 언제나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듯 바다의 승리는 영국의 몫이었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은 넬슨의 지휘하에 영국 해군이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연합함대를 몰살시킨 유명한 싸움으로 프랑스가 해상권을 포기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영국을 해상국으로 고립시키고자 대륙 봉쇄령을 공포하였는데, 이 봉쇄령은 그가 강조한 공격이 아니라 수비였다. 즉 그의 지론에 따르면 프랑스는 영국을 이길 수 없는 것이었고 이 점은 사실이었다. 

 

프랑스, 아니 나폴레옹이 승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패배가 아니었을까? 사실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한 많은 국가들이 정복민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혁명을 통하여 성장한 나폴레옹이 구제도의 상징인 황제가 되어 이웃의 구제도 모순을 타파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복속국에서는 나폴레옹에 반항하는 해방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대륙 봉쇄령을 무시하여 영국과의 교역을 계속 하였다. 나폴레옹은 그의 영광을 위해 러시아를 방관할 수 없었고 러시아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나폴레옹느 제국과 함께 그의 영광을 상실하게 되었다. 

 

 

1812년 6월 60만 명의 병력, 20만명의 수송용 동물을 동원한 대군은 약 30만 명이 프랑스인이었고 나머지는 정복국에서 차출된 병력이었다. 9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항복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러시아는 항복하지 않았고 분노가 치민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파멸하기 위하여 그 넓은 러시아 대륙으로 더 깊이 진군하든지 또는 추위를 대비하여 회군을 하든지 선택해야만 되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의 진격은 죽음임을 알았으므로 하는 수 없이 겨울이 오기 전에 얼어붙은 러시아땅을 빠져나와야만 하였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1812년 10월 19일 러시아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회군하기 시작하였다. 11월 초 이미 눈이 내려 도로는 진흙탕이 되었고 퇴각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자 코사크기병대가 이들을 습격하여 퇴각의 대오를 흐트렸다. 굶주린 병사들은 말을 잡아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고, 이에 러시아의 추격은 더욱 용이해졌다. 낙오된 병사들은 그대로 얼어죽었다. 

 

 

12월 중순 러시아 경계를 벗어난 나폴레옹은 자기에게 곧 다가올 운명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프러시아,스웨덴 등의 연합군이 패배한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나폴레옹군은 더 이상 연합군을 대적할 수 없었고 1814년 봄 연합군은 파리를 점령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폐위되고 죄수의 신세로 전락하여 엘바 섬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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