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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에게 주어진 역전의 기회, 페르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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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에게 주어진 역전의 기회,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7세기, 오리엔트 최초의 통일 국가인 아시리아가 붕괴하고, 기원전 6세기에는 소아시아의 아나트리아 반도에 인도·유럽계 국가인 리디아 왕국이 세워졌다. 리디아 왕국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주조화폐가 만들어졌는데, 이 화폐는 금은 합금으로 주조되었다. 

 

 

그 전까지는 거래가 원시적 형태인 물물교환이었지요. 화폐가 출현함으로써 신용 거래가 가능해졌고, 질적이나 양적으로 거래의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기반이 튼튼한 시장 시스템이 만들어집니다. 리디아 왕국의 화폐경제는 그리스에게 해 지역 일대에도 영향을 끼치면서 대규모 화폐경제권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동시에 그리스 지역으로 인도·유럽계 백인 이민이 급증하면서 그리스는 화폐경제의 확장을 등에 업고 교역을 통해 번영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를 본거지로 삼아 바닷길을 통해 이탈리아 연안, 프랑스 연안, 스페인 연안의 개발·이주도 활발해지면서 지중해의 현관으로서 에게해·그리스의 지리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기원전 6세기 초에는 에게해 교역권이 확립되면서 그리스 각지에서 폴리스라고 불리는 도시사회가 번창한다. 밀레투스,아테네, 스파르타,테베 등이 이러한 폴리스에 해당한다. 

 

에게해 교역이 확대되면서 그리스 경제를 성장시켰지만, 빈부 격차의 확대도 심해졌다. 

 주위의 성장에 뒤처진 무산 계급이 대량 발생하면서 길거리에는 홈리스가 넘쳐 사회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앞날이 깜깜한 그들에게 커다란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다레이오스(다리우스)1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오리엔트의 모든 영토를 손에 넣은 페르시아가 다음에 노리는 곳은 지중해, 그리스 지역이었다. 대국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비하자면 그리스는 '폴리스'라는 촌락 집단이 옹기종기 모인 곳에 불과했다. 

 

대국의 침략에 어떻게 응전할지 그리스의 지도자들 사이에 의견이 두갈래로 나누어졌다. 다수의 지도자들은 페르시아에 항복하자고 주장했다. 강대한 페르시아에 덤벼봤자 승산이 전혀 없었다. 만일 전쟁에서 패한다면 지도자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니까 화해 명분으로 거액을 건네도 좋으니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한편 끝까지 항전을 주장한 인물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그에게는 강대국인 페르시아를 격퇴할 방법이 있었다. 페르시아는 지상전이라면 무적이지만, 그리스와 싸우려면 지중해·에게해를 끼고 해전을 펼쳤야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해양국가인 그리스의 이점을 살려 페르시아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주전론의 입장을 강화하려고 빈곤층 사람들을 선동한다. 길거리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전공을 세우면 부를 거머쥘 수 있다고 설득한다. 빈민들은 자발적으로 테미스토클레스에 협력한다. 그들에게는 군선의 노를 젓는 임무가 맡겨졌다. 테미스토 클레스를 비롯한 주전파에 가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항복하자는 주화파(부유층)를 웃돌자 여론을 기세 좋게 장악해,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빈민들의 확약에 힘입어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승리를 거두었다. 폴리스가 옹기종기 모였을 뿐인 그리스가 강대국인 페르시아를 보기 좋게 쳐부순 것이다.

 

군선의 노를 저었던 빈곤층은 크게 발언할 수 있는 지위를 얻어냈고, 항복하자고 주장했던 귀족이나 상인 부유층은 힘을 잃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는 빈곤층이 부유층을 타도한 일종의 좌파 쿠데타라고도 간주할 수 있다. 약자라고 늘 약한 위치에만 머무르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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