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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시대의 개막 에니악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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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시대의 개막 에니악 개발

 

 

 1946년 2월 15일 저녁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한 실험실에 20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미국 최고의 과학자들과 국방성 고위 관리들, 기자들이었다. 이들의 관심은 실험실 안을 가득 메운 한 대의 기계에 쏠려 있었다. 높이 5.5미터, 길이 30미터, 무게가 30톤에 이르는 거대한 기계였다.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130킬로미터 길이의 전선들로 연결된 1만 8,800개의 진공관이 깜빡거리며 분주히 연산 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실험실 밖에 서 있는 가로등이 순간 꺼졌다. 다시 켜졌다. 

 

"아!" 곧이어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이 풀어도 7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포의 탄도 계산 문제를 이 괴물 같은 기계가 겨우 3초 만에 풀어냈기 때문이었다. 많은 첨단기술의 '출생'이 그러하듯이 컴퓨터도 처음에는 군사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에니악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미 국방성은 대포나 미사일을 발사할 때 탄도를 계산해 줄 고성능의 전자계산기를 필요로 했다. 이 탄도 계산은 대기의 상태, 온도, 바람의 방향과 속도 등에 따라 200단계가 넘는 계산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육군이 그간 해 오던 수작업 계산은 효율성이 극히 떨어졌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존 모클리와 프레스터 에커트가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 비록 개발이 완성된 것은 전쟁이 끝난 후였지만 그 덕에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이 만들어졌다. 에니악은 1초에 열 자리 덧셈과 뺄셈을 5,000회 곱셈을 350회 처리할 수 있었다. 종래의 계산기보다 1,440배 빠른 속도였다. 언론과 학자들은 "총알보다 더 빠른 계산기"라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속도를 높일 수 있었던 비결은 기존의 전자계산기에 사용된 스위치와 계전기 대신 사용된 진공관이었다. 문제는 전력 소모가 크다는 점이었다. 소비전력이 대형 냉장고 100대를 한꺼번에 가동시킨 것과 같았다고 하니, 덩치만큼 잡아먹는 전력의 양도 '공룡급'이었다. 에니악이 소개되었을 당시 필라델피아의 한언론은 "에니악이 켜지면 필라델피아 시 전체가 정전이 된다."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에드박

 

진공관의 수명이 짧고 고장이 잦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가격도 비쌌다. 미 육군이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지불한 가격은 50만 달러에 육박했다. 오늘날 컴퓨터 한 대의 가격과 비교하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거액이다. 

 

에니악의 단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졌다. 미국의 수학자 요한 폰 노이만은 기계식이 아닌 전자식 프로그램 내장 방식을 채택한 에드박(EDVAC)을 만들었다. 그는 컴퓨터가 단순하지만 능률적으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 10진법이 아닌 2진법 표기 방식을 택했다. 

 

모클리와 에커트는 이후 에커트 -모클리 컴퓨터 사 (EMCC)를 세우고 1951년 에니악의 후속인 유니박(UNIVAC)을 내놓았다. 이것이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다. 유니박은 컴퓨터가 군사 목적 외에 다양한 방식으로도 쓰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51년 실시된 제 34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CBS TV 는 개표가 5퍼센트 남짓 진행된 시점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가 일방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정확한 예측을 내놓아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사상 최초로 선거 결과를 예측한 숨은 공로자는 바로 유니박이었다. 

 

유니박

 

유니박은 에니악에 비하면 크기와 무게가 획기적으로 줄어들기는 했으나 여전히 길이가 5미터 정도였고 무게도 13톤이나 나갔다. 가격도 125만 달러가 넘었다. 이후 6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컴퓨터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진공관 대신 트랜지스터가 개발되고, 뒤이어 하나의 칩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담은 집적회로(IC)가 발명되었다. 여기에 1971년 인텔 사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면서 컴퓨터의 덩치는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상용화의 길을 열었다. 

 

 컴퓨터의 용도는 군사용, 과학기술용의 범위를 넘어 사무용 컴퓨터, 개인용 컴퓨터로 나날이 확장되었다. 여기에 전 세계 통신망이 컴퓨터로 연결되어 집에서 어떤 정보든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는 인터넷의 등장은 인간의 삶과 사회, 문화, 정치, 경제의 구조를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인터넷도 처음에는 군사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핵 공격을 받아도 계속 작동할 수 있는 비밀통신망이 인터넷의 모태가 되었다. 1969년 개발된 미 국방성의 내부 군사 네트워크 아르파네트(ARPANET)다. 1990년대 인터넷 서비스가 개시되자 이 폐쇄적인 통신망은 순식간에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의프로그래머 팀 버너스 리가 개발한 월드 와이드 웹 덕분이었다. 인터넷은 순식간에 삶의 일부가 되었다. 1943년 IBM 사 회장 토머스 왓슨은 "세상에 필요한 컴퓨터는 다섯대 정도"라고 예측했다. 또한 1949년 과학 잡지 (파퓰러 메커닉스)의 편집자는 "미래의 컴퓨터는 1.5톤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1977년 디지털 이큅먼트 사의 설립자 케네스 올슨 회장은 "모든 사람이 집에 컴퓨터를 가지려 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이 오늘날 집집마다 컴퓨터가 놓여있고 개인마다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세상을 본다면 머라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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