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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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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30초. 태평양 비행기지를 출발한 미국의 B29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지름 71센티미터, 길이 3.05미터, 무게 약 4톤의 리틀보이가 떨어진 순간, 오렌지색 섬광이 번뜩이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도시의 60퍼센트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반경 500미터 이내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즉사했다. 

 

 

에놀라 게이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종사 중 한 사람은 "오, 하느님,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라고 중얼거렸다. 이날 사망한 히로시마 시민은 7만 8,000명. 부상당한 사람과 행방불명된 사람은 5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방사능 후유증 등으로 앓다가 죽은 이들까지 합치면 모두 24만 명이 원폭의 피해를 입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는 34만 명이었다. 사흘 후인 8월 9일 오전 1시, 두 번째 원자폭탄 '팻 맨'이 나가사키 교외 우라카미 상공에서 폭팔했다. 미쓰비시 철강 공장을 포함해 시의 산업시설 중 30퍼센트가 잿더미가 되었다. 7만 4,000명이 죽었고, 7만 5,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일본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은 1939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비롯되었다. "우라늄의 원자핵 분열을 이용하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폭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독일은 이미 원자핵 분열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미국도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독일 베를린에서 물리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원자핵 분열에 성공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 정부는 1942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의 물리학자들을 중심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나섰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착수 된 것이다. 

 

 

12만 5,000명의 과학자와 20억 달러가 투입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자신이 만들고 있는 최종 결과물이 무엇인지, 옆 실험실에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1942년 12월 엔리코 페르미가 이끄는 물리학자들이 시카고 대학의 한 실험실에서 최초로 제어된 연쇄핵반응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3년 후인 1945년 7월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연구 팀이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모래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플루토늄 폭팔 실험에 성공했다. 

 

높이 15킬로미터, 폭 1.5킬로미터에 달하는 버섯구름이 형성된 실험 결과는 모든 면에서 예상을 뛰어넘었다. 폭팔 당시 생성된 에너지는 TNT 2만 톤에 맞먹었다. 인류가 만든 최악의 살상 무기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오펜하이머조차 버섯구름의 위력을 직접 본 후 "나는 죽음의 신이 되었다."라며 자조했다. 그를 비롯해 원자폭탄 개발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완성된 폭탄을 실전에 사용하지 말것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아인슈타인도 원자폭탄 개발을 제안한 것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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