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지혜로 차지한 중국 대륙 한고조 유방

반응형

지혜로 차지한 중국 대륙 한고조 유방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통일국가로 후세 모든 중국 국가들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한나라를 세운 사람은 놀랍게도 평민 출신인 유방이었다. 유방은  패(沛) 나라 출신으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가사를 돌보지 않고 이런저런 유협의 무리들과 교우했다. 

 

장년이 되어서야 사상 지방의 정장(정이라 불리던 숙소의 관리와 치안을 담당)이라는 말단 관리가 되었다. 하지만 여산의 황제릉 공사에 부역하는 인부들을 호송하던 중 도망자가 속출하며 임무 수행이 어려워지자 나머지 인부들을 풀어주고 자신도 도망쳐서 산중에 은거했다. 

 

유방

 

 진나라 말기 ,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했는데, 당시 유방도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들고 군사를 일으켜 패공이라 칭했다. 다음 해 북상하여 항양, 항우의 군과 만나 연합 세력을 구축했다. 그 후 항우의 군대가 동쪽에서 진나라 군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벌이는 사이, 그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항우보다 앞서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는 진나라 백성에게 법삼장 (세 가지 법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그 정도에 따라 벌한다 그 밖의 진나라 법은 모두 폐기한다'는 것이다. )을 약속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유방이 진을 멸망시키고 수도 함양에 먼저 입성하자 항우는 대노하며 즉시 병사 40만을 홍문에 집결시켰다. 당시 유방의 군사는 10만이었다. 항우는 유방을 물리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모사 범증과 함께 유방을 물리칠 계획을 모의했다. 이때 항우의 숙부 항백이 이 계략을 유방의 진영인 장량에게 알려주었고, 항백이 중재하여 유방은 100여 기를 이끌고 홍문까지 와서 항우에게 사죄하였다. 

 

항우

 

이에 화답하고자 항우는 유방을 위해 홍문에서 잔치를 벌였다. 범증은 이 기회에 유방을 죽이고자 했다. 술자리가 마련되자 약속대로 항우에게 세 번이나 신호를 보냈지만 유방의 사죄에 마음이 누그러진 항우는 묵묵부답이었다. 조급해진 범증은 항장을 시켜 칼춤을 추다가 유방을 죽이라고 시켰으나 이를 안항백이 유방을 막아주어 실패로 돌아갔다. 

 

뒤늦게 번쾌가 달려와 항우와 술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하는 사이 유방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후에 유방은 도중에 자리를 뜬 것을 항우에게 사과하며 항우에게는 구슬 한 쌍을, 범증에게는 옥으로 만든 술잔 한 쌍을, 범증에게는 옥으로 만든 술잔 한 쌍을 선물했다. 

 

항우는 만족해하며 구슬을 받았으나 범증은 잔을 깨뜨리며 "아아. 어린아이와 더불어 대사를 도모할 수가 없구나. 항우의 천하를 빼앗을 사람은 반드시 유방일 것이며, 우리는 이제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라고 한탄했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항우는 서초패왕이라 칭하고, 유방을 한왕에 봉한 후 쓰촨 성과 산서성 남쪽 지방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항우가 초의제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항우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적대시했다. 그 후 4년간에 걸친 항우와의 싸움 끝에 유방은 해하의 결전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실현시켰다. 기원전 202년이었다. 

 

한신

 

한고조가 된 유방은 진시황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실패했음을 교훈삼아 완만한 개혁정치를 실행했고 피폐해진 민생 안정에 주력했다. 아울러 진시황이 실시했던 군현제와 주나라 시대부터 내려오던 분봉제를 혼합하여 군국제도를 실시했다. 

 

일개 지방 정장이었던 유방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참모들의 공이 컸다. 꾀가 많아던 장량과 천하에 둘도 없는 지장이라는 한신, 유방이 일개 관리였던 시절부터 그를 도왔던 소하등 수많은 인물들이 유방의 중국 통일을 위해 애썼다. 이들의 공적을 아는 한고조로서는 이들에게 영토를 분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먼 지방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공신들과 근친들을 중심으로 분봉제를 실시한 것은 처음에는 현명한 조치였다. 

 

그러나 한고조가 직접 다스렸던 군이 15개에 불과했던 반면 이들에게 나누어진 땅은 30개 군이 넘었으므로 한고조의 지배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고조는 이에 불안을 느끼고 이들 이성공신들을 갖은 이유를 붙여 제거하고 왕족들을 제후에 앉혔다. 

 

(사기)에는 항우를 무찌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지략가 한신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신은 공로를 인정받아 초왕에 봉해졌으나 대군을 이끌게 된 한신의 힘에 두려움을 느낀 한고조는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마침 항우의 부하였던 종리매라는 장수가 예 친구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한고조는 그를 체포해오라고 지시하고, 이를 빌미로 그를 회음부로 강등시킨다. 한신은 한고조의 행동에 의심을 느끼면서도 그의 용서를 바라고 종리매의 머리를 들고 갔으나, 한고조는 그 자리에서 그를 체포했다. 한신은 자신의 심정을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는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 "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런 한고조의 정책에도 왕족들 사이에서 세력다툼이 일어났으니 오초칠국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한고조는 한나라를 건국한 지 12년, 황제가 된 지 8년 만인 기원전 195년 장안에서 죽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