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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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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2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한국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특사의 파견을 결심하였다. 이회영,이동녕이 건의하여 특사 파견이 검토되었다. 처음에는 이상설,이준,이위종 외에 김좌진 등 2명이 더 선발되었다가 앞의 3명으로 결정되었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고종의 신임장과 친서를 받아 이준과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를 거쳐 러시아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주재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이위종을 만나 세 사람이 평화회의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이위종은 프랑스어에 능통하였으므로 동행하였다. 이들 일행은 회담을 개최되기 며칠 전에 도착하여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위원으로서 회의에 참가하기를 요구하면서 일본의 부당성을 호소하였다. 

 

「을사 조약은 오로지 일본의 협박에 못이겨 체결된 것이지, 대한제국 황제의 자주적 입장에서 승낙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무효화되어야 한다. 」

 

 

그들은 이 조약의 무효화를 회의의 정식 의제로 상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 고무라의 방해 공작으로 회의 개최 당사국인 네덜란드와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는 '동조약이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된 이상 다시 국제회의에 상정하여 왈가왈부 의논할 수 없으며 한국 대표도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한국 대표들은 열강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영국,미국,프랑스의 대표들을 개별 방문하여 을사 조약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혹은 각국 신문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폭로하였다. 이위종은 평화회의 위원들의 비공식 화합이나 국제협회에 출석하여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열변을 토하였다. 

 

 

이는 각국 대표들로부터 많은 동정을 얻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얻지 못하였다.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해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특사 의거의 배후에는 고종의 근신으로서, 전에 러시아 공사를 지냈던 이범진과 고용교사로서 코리아 리뷰를 서울에서 발행하여, 배일 운동을 선도한 미국 사람 헐버트와 기타 몇몇 외국인이 관여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통감 이토를 통하여 고종을 문책하였다. 고종은 이를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회피했으나, 이토는 이완용과 비밀 접촉을 벌여 몇 차례 내각회의를 소집한 끝에 고종에게 황태자의 섭정을 진언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은 이 진언을 완강히 거부하였나, 일본의 태도가 강경하여 부득이 7월 19일 조서를 내려 황태자의 섭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섭정을 양위하는 것으로 왜곡 선전하고, 섭정을 양위로 조작해 고종을 몰아냈다. 

이에 격분한 민중은 그날 밤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사를 습격하고, 각처에서 일본인을 저격하였다. 성난 군중들은 을사 조약을 체결할 때 찬성한 대신들의 집으로 몰려갔다. 

 

"이 같은 매국노의 집은 모두 불태우고 잡아 죽여야 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군중들은 대신들의 집을 불사르고, 약현의 이완용집도 모두 불살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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