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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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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은 무엇인가

 

 

 

민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하여 일본에 대한 조선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정국이 소란해졌다. 러시아의 웨베르 공사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수병 100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친러파인 이범진등은 웨베르 공사와 공모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세자를 여성용 교자에 숨겨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 갔다. 

 

 

 

이는 차라리 유폐나 다름없었다. 국가의 상징인 왕이 남의 나라 공사관 밀실에서 유폐 생활을 하게 된것이다. 강대국과 신하들의 정권 싸움에 휘말린 왕의 운명도, 앞길을 해아릴 수 없게 되었다. 왕을 일개 정권의 상징으로밖에 보지 않은 당시의 정객들은 친일파나 친러파를 막론하고 모두 왕을 어떻게 하면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여 정권을 잡아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왕의 아관파천 내면에는 다음과 같은 음모가 있었다고 한다. 을미사변으로 명성 황후가 시해되자 정식으로 왕을 모실 사람이 없었으므로, 자연 지밀, 상궁이 왕의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이때 상궁은 엄상궁으로서 그의 출신은 미천하였으나, 일찍이 궁중에 들어와 왕의 총애를 받았다. 엄상궁도 명성 황후가 생존했을 때에는 한때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으나, 명성 황후가 피살된 후부터는 왕비나 다름없이 위세를 부리며 왕을 모시게 되었다. 

 

친러파인 이범진,이윤용,이완용 등은 엄상궁에게 은밀히 돈 4만 냥을 뇌물로 주어 왕을 건청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시게 하였던 것이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왕의 심경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 잔당들이 어느 때 또 나타나 자기에게 무슨 해를 입힐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 싸였던 것이다. 이러한 왕의 심정을 꿰뚫어 본 엄상궁이 잠시 몸을 피하자는 제의를 하니 왕은 즉시 실행에 옮겨 건청궁에서 신무문까지 걸어 나와 러시아 공사관 지하 밀실로 들어갔던 것이다. 밝은 곳을 버리고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왕의 심사도 가련하였다. 

 

왕의 일행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 대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친러파들이 왕을 옹호하여 들어가려 하였다. 러시아 공사는 왕과 세자만을 들여보내고 다른 사람은 접근도 못하게 제지하였다. 왕은 완전히 감금 상태에 있었다. 이후부터 왕을 배알하기 위해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러시아 공사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며, 오직 통역 김홍륙만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는 하루아침에 변하여 친러파의 손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정권을 잡았던 친일 세력의 총리대신 김홍집과 상공대신 정병하는 역적의 죄명으로 경복궁 앞에서 군중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어윤중은 용인에서 목숨을 잃었다. 유길준,조희연, 장박, 권영징, 이두황, 우범선, 이진호 , 이범래 등의 친일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친러 내각에는 이범진이 법무대신, 안경수가 경무사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통역 김홍륙은 일찍이 러시아 지방으로 달아나 러시아어를 잘 하였기 때문에 이때의 정치는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김홍륙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와 같이 러시아는 우리나라 내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부의 고문을 모두 러시아인으로 임명하고, 러시아 무기가 수입되어 은행, 러시아어 학교까지 설립되었다. 세상은 완전히 친러파의 시대로 돌아갔다. 탁지부 고문인 러시아인 알렉세프는 마치 재무부 장관처럼 이권을 농락하여 경인철도 부설권은 미국인 모어스에게, 경의선은 프랑스 사람 그릴르에게 넘겨주었다. 

 

함경도의 광업은 러시아 사람 니시첸키스에게, 압록강 유역의 벌채권은 역시 러시아의 푸리넬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평북의 운산 금광은 미국인에게, 강원도 금성군 당현의 금광권은 독일사람에게 넘겨주는등 이권에 관여하여 막대한 소개료를 착복하였다. 

우리 국민은 이러한 상태를 맹렬히 비난하였으며 특히 독립협회의 국왕 환궁 요구와 이권양도 반대 운동은 거국적인 지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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