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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어릴적 부터 잔인한 성격이였다. 연산군은 어릴적 부터 잔인한 성격이였다. 어릴적 연산군은 비교적 명민했으나 잔인한 구석이 있는 소년이었다. (아성잡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연산군이 본성을 잃은 것은 윤씨가 폐위된 데 원인이 있었다.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자못 슬기롭고 총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다." (명신록)에는 "연산군이 새로 왕위에 오르니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영명한 임금이라 일컬었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신하 중에는 연산군에게 광기나 포학한 성정이 있음을 알아본 사람도 있었다. (명신록)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김종직은 연로함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동향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지금 임금이 영명한데, 선생은 어찌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왔습니다?" 김종직이 이렇게 대답했다. "새 임..
폭군 연산군의 불쌍한 유년시절 폭군 연산군의 불쌍한 유년시절 1476년 11월 7일, 왕궁에서 한 왕자가 태어났다. 아이를 낳은 왕비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고, 왕의 나이는 그녀보다 두 살 어린 스무 살이었다. 왕비는 후궁 시절에 첫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잃었고, 가까스로 두 번째 아이를 잉태한 덕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아이를 출산하니 아들이었다. 왕은 첫아들을 얻은 기쁨을 담아 아이의 이름을 '마음이 지극히 크다'는 뜻의 융이라고 지었는데,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새로운 글자였다. 예부터 자식의 이름에 지나친 의미를 담지 말라고 했거늘, 아비는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에 도취하여 그런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융이 네 살 되던 해인 1479년 6월 2일 , 왕은 왕비를 쫓아낸다. 그녀의 생일이 6월 1일이었으니 생일 밥이 채 ..
성종의 여인들과 여성 편력 성종의 여인들과 여성 편력 성종은 많은 여자를 거느렸지만, 여복은 별로 없었다. 여성 편력 때문에 엄청난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는 모두 세 명의 왕비와 십여명의 후궁을 얻었는데, 첫 왕비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딸이었다. 한명회는 예종과 성종에게 모두 딸을 시집보내 왕비 자리에 앉혔는데, 두 딸 모두 스무 살이 못 되어 죽었다. 성종이 의경세자의 장자이자 자신의 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이 된 것도 한명회의 딸과 결혼한 덕이 컸다. 예종이 죽을 당시 한명회는 조선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 이었고, 그 덕분에 정희대비와 결탁하여 자신의 사위를 왕위에 앉혔다. 하지만 공혜왕후 한 씨는 왕비가 된 지 6년 만에 죽고 말았다. 성종의 두번째 왕비가 된 여인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였다. 윤씨의..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왕 성종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왕 성종 성종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다고 한다. (오산설림)에는 이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임금께서 한 수령이 특이한 정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쓸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아보고 뽑아 올려 집의 (사헌부 종3품관직)를 삼았다. 삼사에서 글을 올려 다투자, 며칠 만에 그를 다시 이조의 참의(정3품)로 삼았다. 삼사에서 또 극력 노란한즉 다시 수일 만에 이조참판(종2품)으로 승진시켰다. 삼사는 드디어 중지하고 다시 놀란하지 않기로 하면서 말했다. "만약 우리가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승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그만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 그 사람은 후에 정승이 되었으며 과연 재능이 직무에 알맞았으니 이로써 사람들이 임금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데 감복 하였다. ..
세조의 관상과 그의 유년시절 세조의 관상과 그의 유년시절 세조는 1417년 9월 24일에 당시 충녕대군이던 세종과 부인 심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위로 누나 둘과 형이 하나 있었다. 그가 두 살이던 1418년에 아버지 충녕대군은 세자로 책봉된 뒤, 왕위에 올랐다. 이때 세 살 위의 형(문종)은 대궐로 들어갔으나 그는 민가에서 지냈다. 그가 궁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당시 상왕 정종의 건강이 몹시 나빳고 또 이듬해에 승하했기 때문이다. 정종에 이어 1420년에는 할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승하했고 2년 뒤에는 태종이 승하했다. 이렇듯 세 번의 국장이 연이어 있었기 때문에 유는 유년시절을 민가에서 보냈다 이에 대해 세조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조는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으므로 모든 어려움과 사실..
태종 이방원의 음흉한 인내력과 과감한 행동력 태종 이방원의 음흉한 인내력과 과감한 행동력 조선이 개국 되자, 강씨와 이방원의 동지적 관계는 끝이 났다. 그들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세자 책봉 문제였다. 조선이 개국 하고 1392년 8월 태조 이성계는 강씨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당시 개국 공신인 배극렴등은 이방원을 세자로 삼을것을 요청했지만, 태조는 왕비 강씨의 주장에 밀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후 방원은 강씨를 정적으로 간주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칫 강씨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방원이 가장 무서워하던 정적은 계모 강씨였다. 그녀는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개국 공신들은 물론이고 태조마저도 자기 뜻대로 움직였다.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강씨와 함께..
태조 이성계 위화도 회군에 인연 끊은 장남 이방우 태조 이성계 위화도 회군에 인연 끊은 장남 이방우 이성계는 전쟁 영웅이라는 명성에 힘입어 중앙 정계호 진출한 후, 1388년에는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요동 정벌을 주창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킨다. 이후 , 이성계는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여 세력을 확대, 역성혁명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런데 이 일과 관련하여 이성계 집안 내부에서 심한 갈등이 생긴다. 이성계의 장남 방우가 위화도 회군을 반역으로 규정하여 아버지를 성토했다. 이방우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철원의 보개산으로 은거하여 집안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위화도 회군 당시 서른다섯 살이었던 방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삼십 대에 이미 예의판서와 밀직부사 벼슬에 오른 촉..
태조 이성계의 관상 외모에 대해서 알아보자 태조 이성계의 관상 외모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외모는 어땟을까? 다행히 태조 어진이 남아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왕들의 어진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몇 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전주시 경기전의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어진은 태조 생존 당시에 제작된 것을 모사한 것이다. 태조 어진은 태종 대와 고종 대에 각각 한 번씩 모사되었다. 조선의 초상화는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그 때문에 천연두 자국까지 매우 상세하게 표현되었다. 어진 역시 이런 화법으로 그려져 묘사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태조의 어진이 언제 그려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어진에 묘사된 이성계의 모습으로 봐서 60대 이후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