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연산군의 불쌍한 유년시절
1476년 11월 7일, 왕궁에서 한 왕자가 태어났다. 아이를 낳은 왕비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고, 왕의 나이는 그녀보다 두 살 어린 스무 살이었다. 왕비는 후궁 시절에 첫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잃었고, 가까스로 두 번째 아이를 잉태한 덕분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아이를 출산하니 아들이었다. 왕은 첫아들을 얻은 기쁨을 담아 아이의 이름을 '마음이 지극히 크다'는 뜻의 융이라고 지었는데,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새로운 글자였다.
예부터 자식의 이름에 지나친 의미를 담지 말라고 했거늘, 아비는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에 도취하여 그런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융이 네 살 되던 해인 1479년 6월 2일 , 왕은 왕비를 쫓아낸다. 그녀의 생일이 6월 1일이었으니 생일 밥이 채 소화되기 전에 그녀는 폐출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왕자가 일곱 살 되던 1482년 8월 16일, 왕은 그녀에게 사약을 내려 자진을 명령했다. 그렇게 왕비는 나이 스물여덟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왕비 윤씨는 죽기 전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을 친정 어머니 신씨에게 전하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으로써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고 또 나를 거둥하는 길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왕자 융은 그런 어머니의 처참한 죽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자랐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은 다음 해에 세자에 책봉되어 조선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생모 윤씨가 폐출된 후, 융을 키운 사람은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 왕후 윤씨였다. 그녀는 시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와 시할머니인 정희대비와 손을 잡고 융의 생모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정현왕후는 1462년에 태어났는데, 열두 살 때인 1473년에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왔고, 열여덟살 때인 1479년 폐비 윤씨가 쫓겨나 죽는 과정에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 윤호와 그녀의 칠촌 아저씨 윤필상이 관여한 정황이 있고, 그녀 또한 가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는 융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여자였지만, 융은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그녀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하지만 어린 연산군이 생모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성잡기)의 다음 내용이다.
윤씨가 폐위된 뒤에 연사군이 세자로 동궁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세자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거리에 나가 놀다 오겠습니다."
성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저녁때 세자가 돌아오자, 성종이 물었다.
"네가 오늘 거리에 나가서 놀 때 무슨 기이한 일이라도 보았느냐?"
세자가 대답했다.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소리를 하면 그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
성종이 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