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가인가 독재자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개혁가인가 독재자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의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 그의 가문은 귀족이지만 매우 가난했고, 아버지 마저 일찍 죽었다. 카이사르는 열여섯 살에 더욱 민주적인 정부를 요구하는 시민과 귀족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젊은이다운 열정은 있었으나 지혜롭지 못했던 카이사르는 그때 독재관 술라를 모욕하는 바람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가문의 중재로 용서받은 뒤, 그는 군에 합류하여 소아시아 원정을 떠났다. 그곳에서 카이사르는 용감하고 뛰어난 군인으로서 자질을 드러냈다. 술라가 죽은 후 고향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정치인이자 뛰어난 웅변가가 되었다. 후에 '권력에 미친 독재자'소리를 듣게 되지만, 그런 사람치고는 놀랍게도 '포풀라리스'라는.. 명예로운 적수 다리우스 3세 명예로운 적수 다리우스 3세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드로스와 공통점이 대단히 많았다. 그 역시 배신이 난무하는 왕궁에서 자랐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380년에 태어났으며, 본명은 코도마누스였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주역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의 직계 자손은 아니었으며, 먼 친척쯤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 환관 바고아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와 그의 아들 아르세스를 살해한 뒤, 꼭두각시로 앉힐 통치자를 찾다가 발견한 사람이 코도마누스였다. 바고아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권좌에 앉은 해인 기원전 336년에 코도마누스를 다리우스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앉혔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조종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었다. 바고아스는 결국 그를 독살하기로 했지만, 다리우스는 이를 미리 알아챘다... 그리스의 구원자 테미스토클래스 그리스의 구원자 테미스토클래스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525년에 외국인 어머니와 아테네 귀족 가문 출신의 아버지 네오클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외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어린 시절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성인이 되어 한동안 상인으로 일했던 듯하며, 이후 당시 아테네 사회에서 유망한 직업이었던 변호사가 되었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플루타르크 같은 역사가들은 테미스토클레스를 활달한 정치적 지도자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는 사교적이고 매력적인 한편으로 인맥을 만들고 이용할 줄 아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아테네 유명 인사들은 그가 상스럽다고 배안시했다. 성공하기 위해 뇌물을 주고,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하층민과 친분을 다져 그들의 지지로 원로회 의원에 당선.. 신의 몰락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 신의 몰락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1세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며, 그 이름은 '영웅을 다스리는 자' 라는 뜻의 그리스 어로 표기한 것이다. 36세에 그리스를 침공한 크세르크세스는 자타가 공인한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의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왕중의 왕이자 수많은 사람이 사는 땅의 왕, 이 넓고 위대한 지상을 다스리는 왕 크세르크세스다.' 헤로도토스 같은 당대 그리스 역사가들은 크세르크세스를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기록을 보면 그는 키가 크고 당당하며 자신만만하고 잘생긴 사람이었다. 진실은 그사이 어디쯤 있지 않을까?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그는 왕위에 오른지 겨우 4년째였으며, 자신감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태어날 때부.. 타고난 정치 천재 숙종 타고난 정치 천재 숙종 "그대는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하는구나." 열네 살 소년 왕이 조선 학문을 대표하는 예문관 대제학 이단하에게 한 말이다. 숙종이 이말을 하게 된 배경을 보면 숙종이 타고난 정치 천재라는 것을 알수있다. 숙종 즉위 당시 조선의 정치는 예송 문제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서인과 남인의 예송 정쟁은 가속화되었다. 문제는 효종의 어머니 조 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상복을 몇년 입어야 옳으냐였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므로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의 영수 윤휴와 허목은 차남이지만 왕위를 이었으므로 장남에 준하는 예로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서인과 남인 간의 격한.. 살인귀 연산군과 김처선의 죽음 살인귀 연산군과 김처선의 죽음 연산군의 학정과 패악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이를 보다 못한 내관 김처선이 직언하다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처선의 직언에 분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당장 그를 하옥시켰다. 그리고 우선 장 100대를 때리고 궁 밖으로 쫓아냈다. 거의 초주검이 된 채로 궁 밖으로 내던져진 김처선은 그로부터 수개월 동안 제대로 운신하지 못했다. 김처선이 누워 있는 동안에도 연산군의 피의 잔치는 이어졌다. 김처선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것은 이듬해 4월 1일이었다. 이날 김처선은 궁으로 향하면서 집안사람들에게 궁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기 위해 술도 한잔 걸치고 연산군을 찾아가 독설을 쏟아냈다.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연산군과 장녹수 잔인함 연산군과 장녹수 잔인함 연산군의 광기는 색욕과 살인으로 귀결되었는데, 전국에 신하들을 파견하여 기생을 뽑아 궁궐에 들이고, 그중 마음에 드는 여자는 모두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후궁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스무 명을 훌쩍 넘겼다. 후궁 중에 연산군이 특히 총애하던 여인 셋이 있었는데 , 장녹수와 전전비 그리고 백견이었다. 이들은 모두 천비 출신의 기생들이었다. 이들 중에 연산군이 가장 아낀 여인은 장녹수였다. 장녹수는 갑자사화 이전에 연산군이 후궁으로 들인 여인이었다. 장녹수는 원래 집안이 곤궁하여 몸을 팔아 생활하던 여자였다. 그런 탓에 여러 남자와 살았다. 그러던 중에 제안대군(예종의 아들)의 가노와 결혼하였다. 이후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고, 그런 상황에서 춤과 노래를 배워 창기가 되었다. .. 공부를 싫어한 연산군 공부를 싫어한 연산군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다들 영명한 임금이 즉위했다고 칭송이 자자했지만, 연산군은 학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문을 좋아하지 않은 세자로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을 첫째로 꼽을 수 있는데, 연산군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상황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생기면 관련된 사람을 결코 그냥 두지 않았다. 이는 양녕대군에게는 없던 성정이었다. (사재칙언)의 다음 내용에서 연산군의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허침은 정4품의 필선이 되고, 조지서는 종3품의 보덕이 되었다. 폐주는 날마다 유희만 일삼고 학문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만, 성종의 훈계가 엄함을 두려워하여 서연에 억지로 나올 따름이었다. 동궁의.. 이전 1 ··· 22 23 24 25 26 27 28 ··· 4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