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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정치 천재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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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정치 천재 숙종

 

 

"그대는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하는구나."

 

열네 살 소년 왕이 조선 학문을 대표하는 예문관 대제학 이단하에게 한 말이다. 숙종이 이말을 하게 된 배경을 보면 숙종이 타고난 정치 천재라는 것을 알수있다. 

 

숙종 즉위 당시 조선의 정치는 예송 문제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서인과 남인의 예송 정쟁은 가속화되었다. 문제는 효종의 어머니 조 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상복을 몇년 입어야 옳으냐였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므로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의 영수 윤휴와 허목은 차남이지만 왕위를 이었으므로 장남에 준하는 예로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서인과 남인 간의 격한 정쟁이 지속되었고, 이는 현종 재위 기간내내 이어졌다. 그리고 막상 현종이 죽자, 다시 예송 문제가 불거졌다. 하지만 당시 열네살의 소년 숙종은 자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며 이 문제를 과감하게 풀어나갔다. 

 

숙종은 송시열(서인 산당파 영수)에게 현종의 지문을 지어올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영남 진주의 유생 곽세건이 남인을 대변하며 송시열이 효종을 '서자'라고 지칭한 인물이라며 지문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서인이 대거 일어나 곽세건에게 벌을 주라고 주청했다. 하지만 숙종은 곽세건의 상소를 받아들여 송시열리 지문 짓는 것을 중지 하게 하고, 5촌 외당숙 김석주에게 지문을 짓게 했다. 이에 대해 서인들의 반발이 심했는데, 어린 숙종은 과감한 조처를 통해 서인들을 일거에 침묵하게 하였다. 당시 상황을(당의통략)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대사헌 민시중과 지평 이수언 등이 곽세건을 국문하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성균관에서도 상소를 배척하라고 했으나 숙종은 이렇게 대답했다. 

 

"곽세건의 충언을 어찌 흉한 상소라 하는가? 정녕 내가 어린 임금이라고 해서 나의 얇고 작음을 시험해보려는 것이냐?"

 

그 뒤에 경기 유생 이필익이 곽세건에게 벌주기를 청하고 송시열을 불러올리라고 하자 이필익을 귀양 보냈다. 

 

이후 남인 허목을 대사헌으로, 윤휴를 장령으로 삼아 예송을 논의하다 유폐 되거나 금고 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고 이조참의 김석주에게 지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또 대제학 이단하가 지은 현종의 행장속에 '상복을 고쳐 바르게 하다'라는 문장의 뜻이 분명하지 않고 또 기해년(1659)에 복제를 논의한 자들 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이단하에게 고쳐서 삽입하라고 지시했다. 이단하는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숙종의 명령을 받고 이단하가 상소하여 말했다. 

 

 

"양조(효종과 현종)의 빈사(왕의 스승, 곧 송시열을 의미한)이므로 차마 이름을 지목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숙종은 이단하에게 잘못된 것을 고쳐서 삽입하도록 두세 차례 재촉하였다. 이에 이단하는'송시열이 예기를 인용하였다. 운운이라고 고쳐 넣었다. 임금이 이것을 보고 말했다. 

 

"내가 나이가 어려서 글에 능숙하지 못하고 또 예를 알지 못하지만, 반드시 송시열이 예를 그르쳤다고 말한 뒤에야 선왕이 처분한 의미가 명백해질 것이니 '예기를 인용하였다'는 말을 '예기를 잘못 인용하였다'로 고쳐야 할 것이다."

 

이때 숙종의 나이가 열네 살이었는데, 온조정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단하가 물러 나와 상소하였다. 

"엄한 가르침에 핍박 되어 '오'라는 글자를 써넣었습니다. "

그 말을 듣고 숙종은 "그대는 스승만 알고 임금을 알지 못하는구나"라며 꾸짖고 파면하였다.

 

(당의통략)의 이 내용은 실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열네 살의 어린 왕이 수십 년 조정 밥을 먹은 노련한 정치인들을 상대로 이렇듯 단호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과정을 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숙종이 이렇듯 단호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외당숙 김석주가 버티고 있었다. 당시 서인은 이른바 한당파로 불리는 김육의 세력과 산당파로 불린 김집의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김석주는 김육의 아들인 김좌명의 아들이었고,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는 김좌명의 동생 김우명의 딸이었다. 따라서 당시 한당파는 김우명과 김석주가 이끌고 있었다. 

 

반면, 산당파는 김집의 제자 송시열이 이끌고 송시열 세력인 산당파를 배척했다.  

 

이런 정치적 배경 때문에 김석주와 외조부 김우명의 말을 듣고 숙종이 송시열 세력을 배척했더라도 숙종이 산당파 대신들을 상대하며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과정은 열네 살 소년의 솜씨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양말로 타고난 정치 천재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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