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과 장녹수 잔인함
연산군의 광기는 색욕과 살인으로 귀결되었는데, 전국에 신하들을 파견하여 기생을 뽑아 궁궐에 들이고, 그중 마음에 드는 여자는 모두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후궁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스무 명을 훌쩍 넘겼다. 후궁 중에 연산군이 특히 총애하던 여인 셋이 있었는데 , 장녹수와 전전비 그리고 백견이었다. 이들은 모두 천비 출신의 기생들이었다.
이들 중에 연산군이 가장 아낀 여인은 장녹수였다. 장녹수는 갑자사화 이전에 연산군이 후궁으로 들인 여인이었다. 장녹수는 원래 집안이 곤궁하여 몸을 팔아 생활하던 여자였다.
그런 탓에 여러 남자와 살았다. 그러던 중에 제안대군(예종의 아들)의 가노와 결혼하였다. 이후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고, 그런 상황에서 춤과 노래를 배워 창기가 되었다.
그녀의 노래와 춤 실력은 탁월했으며 특히 노래를 무척 잘하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고 고운 목소리를 낼 정도였다고 한다. 외모는 나이에 비해 매우 앳된 얼굴이었다. 나이 서른에도 얼굴은 열여섯 처녀처럼 고왔다. 연산군이 소문을 듣고 그녀를 불렀다. 연산군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 즉시 궁으로 들여 애첩으로 삼았다. 이후 그녀는 숙원의 첩지를 받았고, 계속 품계가 올라 숙용에 이르렀다.
그녀는 일반 후궁들처럼 연산군을 대하지 않았는데, 특이하게도 연산군은 그녀의 그런 면에 매료되었다. 실록에서는 연산군에 대한 그녀의 행동에 대해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에게 하듯 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연산군은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녹수만 보면 기뻐했다. 실록은 또 장녹수에 대해 "얼굴은 중인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고 쓰고 있다. 연산군은 장녹수의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 들어줬고, 장녹수 와 함께하는 일은 뭐든지 즐거워했다. 그러니 후궁 중에 장녹수를 질투하는 여인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연산군은 후궁들의 질투를 절대 용납 하지 않았다.
재위 10년(1504년) 6월 19일에 연산군은 후궁 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죽임을 당한 이는 최전향과 수근비라는 궁녀였다. 연산군은 이들을 죽인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들의 사지를 전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각각 다른 곳에 묻었으며, 묻은 자리에는 죄명을 적은 돌을 세웠다. 도대체 이 두 궁녀는 누구이며,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지독한 처벌을 했을까?
전향과 수근비는 원래 연산군이 총애하는 여자였다. 전향은 출신이 분명치 않은 후궁이었고, 수근비는 여종 출신 궁녀이자 애첩이었다. 전향이 언제 후궁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근비는 이 사건이 있던 해인 1504년 3월 7일에 궁녀가 된 여인이다. 그녀는 원래 사노였으나 연산군이 관비 옥금을 그녀 대신 내주며서 입궁시킨 여인이었다.
당시 연산군은 전국에 채흥사를 파견하여 대궐로 엄청난 수의 여인을 모아들여 음주가무를 즐겼는데, 그런 가운데 눈에 띄는 여인이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취아여 애첩으로 삼았다. 전향과 수근비도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후궁이 된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로부터 한 달쯤 뒤에 궁궐에서 쫓겨났다. 그 이유는 연산군은 이렇게 말한다.
"부인의 행실은 투기하지 않는 것을 어질게 여긴다. 그러나 지금 전향과 수근비는 간사하고 흉악하며 교만한 마음으로 투기하여 내정의 교화를 막히게 했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질투심을 드러내다 발각되어 쫓겨난 것이다. 연산군은 그들을 쫓아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장 80대를 때리게 하고, 전향은 강계에, 수근비는 온성에 유배를 보냈다. 연산군이 한때 총애하여 후궁으로 삼았던 그들을 유배시킨 것은 장녹수 때문이었다. 장녹수가 연산군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전향과 수근비가 질투를 했고, 그것이 연산군에게 발각되어 폐출된 것이다. 장녹수로 인한 다른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는 여간 아니었다. 전향과 수근비는 바로 장녹수를 시기하다가 그들 모두의 본보기가 된 격이었다.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유배지로 떠난 뒤 그들의 일족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간밤에 도성 담벼락에 익명서가 나붙었는데, 그 내용이 연산군을 비하하고 장녹수를 저주하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것을 전향과 수근비 일족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잡아들였다. 그들을 국문한 것은 추관으로 선임된 유순과 의금부 당사솬들이었다.
두 여인의 일족 60명을 잡아들여 국문했지만, 아무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산군은 그들의 이웃집 사람 40명을 더 잡아들여 고문을 하고 다그쳤지만 모자랐는지 전향과 수근비의 사지를 찢고 머리를 뽀아 전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