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귀 연산군과 김처선의 죽음
연산군의 학정과 패악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이를 보다 못한 내관 김처선이 직언하다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처선의 직언에 분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당장 그를 하옥시켰다. 그리고 우선 장 100대를 때리고 궁 밖으로 쫓아냈다. 거의 초주검이 된 채로 궁 밖으로 내던져진 김처선은 그로부터 수개월 동안 제대로 운신하지 못했다. 김처선이 누워 있는 동안에도 연산군의 피의 잔치는 이어졌다.
김처선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것은 이듬해 4월 1일이었다. 이날 김처선은 궁으로 향하면서 집안사람들에게 궁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기 위해 술도 한잔 걸치고 연산군을 찾아가 독설을 쏟아냈다.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도 대강 통했는데, 고금을 통틀어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미 죽기로 각오한 그였다. 연산군은 그 말을 듣고 화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내 화살이 김처선의 갈빗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김처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죽이십시오. 다만,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김처선은 그때 이미 연산군이 쫓겨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 말에 연산군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미친 듯이 활을 쏘아댔다. 활살을 맞고 김처선이 쓰러지자, 연산군은 칼을 뽑아 그의 다리를 내리쳤다. 양쪽 다리와 팔을 모두 칼로 내리쳐 자른 뒤에 연산군이 소리쳤다.
"일어나 걸으라! 어명이다. 걸으라!"
김처선이 고통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상감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어 다닐 수 있소이까?"
그러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자르고 직접 칼로 그의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냈다. 당시 김처선은 숨이 멎을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조신의 (소문쇄록)에 나오는데, 다소 과장한 면이 있겠지만, 당시 연산군의 행동 으로 봐서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연산군이 김처선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흥분했는지는 그가 이후에 취한 조치에서 잘 드러난다. 연산군은 그날 김처선을 죽이고, 김처선의 양자이자 환관이었던 이공신도 죽였다.
"내관 김처선이 몹시 술에 취해 임금을 꾸짖었으니, 그 가산을 적몰하고 그 집을 헐어 연못을 파고 김씨의 본관을 혁파하라."
연산군은 김처선의 흔적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없애려 했다. 심지어 본관까지 혁파하라고 했으니, 그의 분노가 어떠했는지 알 만하다. 그런데 연산군의 분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처선의 7촌까지 모두 죄인으로 다스리고, 김처선 부모의 무덤을 없애고, 석물을 없앴다. 심지어 김처선에 관한 분노를 담은 시까지 쓰며 승지에게 화답 시를 바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김처선의 일은 연산군에게도 매우 고통스러웠던 모양이였다. 그는 궁중에서 자신이 직접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인 일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불법으로 여기기 때문에 침식이 편안치 않고 더욱 유감스럽다."
연산군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김처선과 이공신의 아내를 관비로 삼아 내사복시에서 일을 시켰다. 또 대소 신료 및 군사 중에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자는 모두 개명하게 했고, 절기 중 처서를 조서로 고치게 했는데, 처서의 '처'자가 김처선의 '처'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김처선에 대한 분노는 그래도 계속 이어졌다. 1506년 3월 12일에는 김처선의 집을 철거하여 못을 팠는데, 거기에 김처선의 죄를 새긴 돌을 묻게 했다. 또 다음날에는 김처선의 죄명을 돌에 새겨 그 집 길가에도 묻고 담을 쌓으라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