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가인가 독재자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의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 그의 가문은 귀족이지만 매우 가난했고, 아버지 마저 일찍 죽었다. 카이사르는 열여섯 살에 더욱 민주적인 정부를 요구하는 시민과 귀족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젊은이다운 열정은 있었으나 지혜롭지 못했던 카이사르는 그때 독재관 술라를 모욕하는 바람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가문의 중재로 용서받은 뒤, 그는 군에 합류하여 소아시아 원정을 떠났다.
그곳에서 카이사르는 용감하고 뛰어난 군인으로서 자질을 드러냈다.
술라가 죽은 후 고향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정치인이자 뛰어난 웅변가가 되었다. 후에 '권력에 미친 독재자'소리를 듣게 되지만, 그런 사람치고는 놀랍게도 '포풀라리스'라는 개혁가 집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프롤레타리'혹은 '플레베스'라고 불리던 평민의 생활을 개선할 방법을 찾거나 혹은 찾는 척했다. 한편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총독으로 성공적인 임기를 보내며 군사 기술을 계속 갈고 닦았다.
기원전 63년에 로마로 돌아온 그는 마르쿠스 비불루스와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진정한 권력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만든 제1차 삼두체제에 있었다.
로마의 영토가 빠르게 넓어지면서 사람들은 국가의 수장으로 단 한 사람의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름 있는 지도자들이 평민의 지지와 각 군단의 지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재하기 시작했다. 원전을 계속하기 위해 더 많은 명성과 부가 필요했던 카이사르는 공동 집정관 임기를 마친 뒤, 갈리아 총독이 되어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면서 명성을 높여 갔다.
기원전 58년, 키가 크고 용모가 훤칠했던 42세의 카이사르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라틴 어 산문과 정치 선전, 군사 전략에 뛰어났다. 당대 사람들은 그르 '지칠 줄 모르고 , 밤에 4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으며, 말을 타고 여행하는 내내 양편에 보좌관을 대동해서 받아 적게 했다'고 묘사했다. 이렇게 저서 (갈리아 원정기)를 집필했을 뿐아니라, 그는 시를 짓고 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썼으며, 심지어 과학 연구까지 했다. 제 1차 브리타니아 침공 때 그는 물시계를 이용해 하루의 길이를 측정하는 실험도 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통해 원하던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로마군의 여러 군단을 확실하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폼페이우스 휘하의 원로원은 이런 카이사르를 경계했고, 그에게 로마로 돌아와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했다. 카이사르는 이요구에 따르는 대신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을 금지하던 로마의 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로써 내전이 일어나 기원전 46년까지 이어졌고,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사망하면서 끝을 맺었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개선하여 이후 몇 년간 종신 독재관을 비롯하여 원로원의 온갖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 카이사르가 대중과 군인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얻자 원로원은 더욱 분노했다. 결국, 기원전 44년에 그는 일단의 음모가들에게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국을 위협한 권력에 미친 귀족이었을까? 아니면 사회주의적 부의 재분배에 관심을 두었던 진보적인 지도자였을까?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도 학자들 간에 논쟁이 많다. 암살범들의 동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공화국을 구하고자 암살을 감행했다면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내전이 끝난 후 카이사르의 조카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을 대신하여 로마 제국을 세웠고, 제국은 이후 500년 동안 번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