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 위화도 회군에 인연 끊은 장남 이방우
이성계는 전쟁 영웅이라는 명성에 힘입어 중앙 정계호 진출한 후, 1388년에는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요동 정벌을 주창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킨다.
이후 , 이성계는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여 세력을 확대, 역성혁명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런데 이 일과 관련하여 이성계 집안 내부에서 심한 갈등이 생긴다. 이성계의 장남 방우가 위화도 회군을 반역으로 규정하여 아버지를 성토했다. 이방우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철원의 보개산으로 은거하여 집안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위화도 회군 당시 서른다섯 살이었던 방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삼십 대에 이미 예의판서와 밀직부사 벼슬에 오른 촉망받는 인재였다. 이성계도 그런 장남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정작 위화도 회군을 두고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이 현실성 없는 망상에서 비롯된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그 명령을 내린 상관 최영과 우왕을 제거하는 것이 대의에 맞는 일이라고 보는 반면 방우는 왕명을 받고 적을 치기 위해 떠난 장수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거꾸로 창을 돌려 섬기던 왕을 공격하는 것은 반역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그 반역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견딜 수 없어 아예 가족과 함께 속세를 버리고 은거해버렸다.
이방우의 이 사건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긴 사료는 없다. 또 이사건에 대한 이성계의 반응을 기록한 서적도 없다. 하지만 한 시대를 가르는 중대한 사건을 두고 부자간에 의견이 충돌하여 서로 인연을 끓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아비로서의 이성계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알 만한 일이다.
그런 아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방우는 조선 개국 후에도 이성계를 찾지 않았다.
그는 위화도 회군 이후 4년 동안 철원의 보개산에서 은거하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황해도 해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서 서너달 지내다가 다시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이후, 방우는 술로 날을 보냈고 결국 마흔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은 이성계에게 조정의 요직과 조선의 개국이라는 선물을 안겼지만 , 가장 신뢰하고 자랑스러워하던 장남을 잃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집안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반대한 인물은 방우 말고 또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성계가 따르고 섬기던 이복형 이원계도 회군을 불충으로 규정했다. 이원계는 고려 왕조에서 문과와 무과에 모두 급제한 인물로 요동 정벌에도 참전하여 이성계 휘하에서 조전 원수로 있었다. 그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려 할 때 반대했으며, 회군 이후 최영과 우왕이 내쫒기자, 아들 넷을 모아놓고 "너희는 나와 처지가 다르니 숙부(이성계)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여라"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함경도 화주에서 음독자살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