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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음흉한 인내력과 과감한 행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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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음흉한 인내력과 과감한 행동력

 

 

 

조선이 개국 되자, 강씨와 이방원의 동지적 관계는 끝이 났다. 그들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세자 책봉 문제였다. 조선이 개국 하고 1392년 8월 태조 이성계는 강씨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당시 개국 공신인 배극렴등은 이방원을 세자로 삼을것을 요청했지만, 태조는 왕비 강씨의 주장에 밀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후 방원은 강씨를 정적으로 간주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칫 강씨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방원이 가장 무서워하던 정적은 계모 강씨였다. 그녀는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개국 공신들은 물론이고 태조마저도 자기 뜻대로 움직였다.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강씨와 함께 살아서 그녀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정몽주 척살 과정에서 알수 있듯 강씨는 과감하고 냉정했으며, 영악한 인물이었다. 비록 본처의 자식이라도 영리하고 뛰어나면 기꺼이 품어주며 자기편으로 만들 줄 아는 여인 이었고, 정적이라고 판단 되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릴 만큼 잔인한 구석도 있었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보듯 주장이 강하고 야망도 컸다. 그런 그녀였기에 이방원은 몹시 몸을 사리며 세자 책봉에 대한 어떤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고,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가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 철저히 협조했다. 

심지어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이성계의 친아들을 명나라 조정에 입조시키라고 할때도 주저 없이 명나라로 갔다. 당시 중국을 다녀오는 일은 몹시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이성계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있던 명 태조 주원장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볼모로 잡히거나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그런 길이었다. 그런데도 방원은 거부하지 않았다. 목적은 단 하나, 강씨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고 야심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이방원은 그렇듯 음흉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다. 기회를 잡을 때까지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기다릴 줄 알았다. 하지만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적을 공격할 때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무참히 죽이는 잔인한 구석도 있었다. 정몽주를 척살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적이라고 판단 하면 반드시 목숨을 끊어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이방원은 때가 될 때까지는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란, 계모 강씨와 아버지 이성계가 동시에 힘을 잃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하늘은 그의 편이었다. 그의 최대 정적인 강씨가 자주 앓아눕기 시작했다. 강씨가 아예 병사에서  생활하는 신세가 되고, 그후 죽었지만, 이방원은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 그의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태조가 병상에 누워 며칠째 일어나지 못하자 1398년 8월 26일 이방원은 숨기고 있던 야망을 가차없이 드러낸다.

우선 자신의 사병을 빼앗는 작업에 앞장섰던 정도전을 격살했다. 또 방석의 장인 심효생, 정도전과 뜻을 같이했던 남은도 죽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에게 반역의 죄를 씌어 세자 방석을 죽이고, 세자의 형 방번과 그들의 매형 이제도 죽였다. 이모든 일이 하루에 벌어진 일이었다. 6년 동안 숨기고 있던 야망이 드러나는 순간 , 정적들의 목을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여느 인물이라면 세자 방석이나 방번, 이제 정도는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했겠지만, 이방원은 모두를 죽이는 것이 화근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 한것이다. 이렇듯 이방원은 음흉함과 잔인함으로 무장한 냉혈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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