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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관상과 그의 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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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관상과 그의 유년시절

 

 

세조는 1417년 9월 24일에 당시 충녕대군이던 세종과 부인 심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위로 누나 둘과 형이 하나 있었다. 그가 두 살이던 1418년에 아버지 충녕대군은 세자로 책봉된 뒤, 왕위에 올랐다.

이때 세 살 위의 형(문종)은 대궐로 들어갔으나 그는 민가에서 지냈다. 그가 궁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당시 상왕 정종의 건강이 몹시 나빳고 또 이듬해에 승하했기 때문이다. 

 

정종에 이어 1420년에는 할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승하했고 2년 뒤에는 태종이 승하했다. 이렇듯 세 번의 국장이 연이어 있었기 때문에 유는 유년시절을 민가에서 보냈다 이에 대해 세조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조는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으므로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일찍부터 자세히 겪어 알고 있었으며 도량이 성숙하였다. 왕자 유는 머리도 좋고 체력도 뛰어났다. 다섯 살에(효경)을 외워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으나 학문보다는 무술을 더 좋아했다. 이에 대해 세조실록은 그를 "문학과 활쏘기와 말타기가 고금에 뛰어났으며, 역학, 산학, 음률,의술,점, 기예 등에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묘를 다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각잡기)에 따르면 세조는 얼굴이 괴기하고 활쏘기와 말 달리기가 남보다 뛰어났고 나이 열여섯에 세종을 따라 왕방산에서 하루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십 마리를 쏘아서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 등이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오늘 뜻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를 뵙는 듯합니다."

 

대개 왕의 얼굴에 대해서는 용의 형상이나 호랑이 형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괴기하다고 표현했다는 것은 가히 매끈하게 생기거나 평범한 얼굴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궁술과 승마에 매우 뛰어나 태조의 솜씨에 비견됐을 정도였다고 했는데, 이는 세조가 무술에 남다른 애착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아버지 세종은 왕자 유의 이런 면모를 싫어 하지 않았다. 세종의 아들 중에 임영대군도 무술이 뛰어났는데, 세종은 임영대군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것은 임영대군이 학문은 하지 않고 축첩을 일삼아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조는 여색으로 애를 먹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학문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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