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 수르왕조 전쟁 (전기1535~36) 무굴 제국- 수르왕조 전쟁(전기1535~36) 인도 무굴 제국 황제 후마윤(1508~56)은 1532년에 추나르에 있는 비하르의 요새를 점령하지 못하여 비하르의 수르 왕조(아프간족의 일파인 파슈툰족 왕조)통치자 셰르 샤 수리(셰르 칸. 1486~1545)와 끝없는 싸움을 하게 됐다. 셰르 샤 수리는 바부르가 인도에서 승리를 거둘 때 카불에서부터 동행했다. 1535년 후마윤이 무굴 제국 -구자라트 전쟁을 위해 델리를 비우자 셰르 샤 수리는 독립을 주장하며 뱅골을 침공했다. 그러자 후마윤은 구자라트 술탄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우기였는데도 군대를 동쪽으로 몰아 1537년에 벵골에 당도했다. 그러나 후마윤은 구자라트 전쟁에서 그랬듯이 다른 곳으로 다시 이동했다. 이번에는 델리에서 동생들이 일으킨 반란 때문이.. 몽골의 아바스 왕조 정복 몽골의 아바스 왕조 정복 1251년부터 죽을 때까지 몽골의 카간이었던 몽케 칸(헌종,1209~59)은 아바스 왕조를 정복하여 대마초를 피우는 테러리스트와 살인자의 비밀결사인 이슬람교 아사신파의 뿌리를 뽑고 이집트 국경에 도달하고자 했다. 몽케 칸의 동생으로 아바스 왕조에 인접한 일한국(훌레구 울루스)의 건국자 훌레구 칸(1218?~65)이 정복을 담당했다. 후레구 칸은 군대를 이끌고 옥수스(아무다리야) 강을 출발하여 나일강에 거의 닿을 때까지 진격했다. 페르시아는 몽골이 특히 이슬람교도의야심을 꺽고 다시 지배권을 확립하기를 원했다. 키트부카(1260년 사망) 장군이 훌레구 칸의 신중하고 철저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몽골은 1256년에 사마르칸트를 떠나 알보르즈 산맥의 동굴과 성에 있는 아사신파의 거점들.. 미트리다테스 전쟁 미트리다테스 전쟁 제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기원전 88~기원전 84) 미트리다테스 6세(기원전 132?~ 기원전 63) '대왕'은 어린 나이에 소아시아 중앙 지역인 폰토스(폰투스)의 왕이 됐고, 성인이 되자 주변 지역의 주민들을 자신의 제국으로 통합하는 일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소아시아에 주둔한 로마 군대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소아시아의 거의 모든 도시를 점령했고 , 수많은 로마인을 학살 하라고 명령했다. 기원전 85년 미트리다테스 6세의 그리스인 협력자들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슐라(기원전138?~기원전78)가 지휘하는 로마 군대와 대결하여 패했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기원전84년 사망)가 이끄는 다른 로마 군대에 쫓겨 폰토스로 되돌.. 미국의 파나마 침공 미국의 파나마 침공 1983년 12월에서 1989년 12월까지 독재자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은 파나마 방위군의 수장으로서 사실상 파나마를 통치했다. 사회의 혼란이 가중되고 반대파가 탄압을 받자(노리에가는 1989년 5월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무효로 했다.)미국이 외교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노리에가를 강하게 압박했다. 노리에가는 미국에서 마약 거래 혐의로 기소됐다. 미주기구 oas와 여러 국가가 미국과 파나마 사이의 불화를 해소해보려고 노력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1989년 10월 3일 노리에가를 제거하려는 군사 쿠데타가 실패한 뒤 파나마 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고 비산'전쟁'조치를 발포했다. 12월15일 의회는 노리에가를 '최고 지도자'로 선언했고,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12월 20일.. 가장 가난한 대통령 호세 무히카 가장 가난한 대통령 호세 무히카 2012년 '리우+20회의' 에서의 연설과 2013년 세계 최초의 대마 합법화, 게다가 2014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떠오르면서 일약 시대의 총아가 된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 그의 간략한 경력과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인가를 살펴보자. 그는 1935년, 남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작은 농장을 경영했는데 파산하여 그가 다섯 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어린 무히카는 가축을 돌보고 꽃을 파는 일을 하면서 성장했다. 1960년대 들어 극좌 도시 게릴라 조직에 가입하여 게릴라 활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의 총알 여섯 발을 맞아 죽을 고비도 넘겼고 네 번의 체포, 두 번의 탈옥을 하기도 했다. 1972년 체포 후 .. 두 형제의 전쟁 미겔파 전쟁 두 형제의 전쟁 미겔파 전쟁 동 미겔(1892~66)이 이끄는 포루투갈 절대왕정주의자들은 입법권을 지닌 새로운 코르트스(의회)의 구성을 반대했다. 동 미겔은 형인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포르투갈 왕 페드루4세 1798~1834)가 반포한 헌법제정 선언을 수용한뒤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1819~53)가 미성년일 동안 섭정으로 통치했다. 동 미겔은 마리아 다 글로리아라고도 불렀던 마리아 2세와 대리인을 내세워 혼인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 미겔은 페드루 1세에게 했던 맹세를 어기고 온건한 지사들과 군 장교들을 독재적인 인사들로 교체했으며, 코르트스를 복종적인 기구로 대체했다. 코르트스는 1828년 5월 미겔을 포르투갈 왕으로 선포했다. 페드루 1세의 어린 딸이었던 여오아 마리아 2세는 브라질에서 포르투.. 기니비사우 내전이란 기니비사우 내전이란 1998년 6월 기니비사우의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 (1939-2009)대통령은 안수마느 마네(1940-2000)군대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이웃 나라 세네갈의 반군에 무기를 공급했다고 비난하며 해임했다. 세네갈 주민은 기니비사우 주민과 매우 가까운 종족이었다. 급여와 근무조건에 오랫동안 불만을 품었던 많은 병사들이 마네를 지지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수도 비사우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라의 여러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비에이라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비에이라는 1980년에 군대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서 쿠데타를 주도했고 1994년 자유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뒤 시장을 개혁하고 복수 정당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조치를 실행했으나,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이라는 비난을 면하.. 믿음을 배반한 살인 글렌코 학살 믿음을 배반한 살인 글렌코 학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 윌리엄 3세를 여러 방식으로 통제하려 했다. 윌리엄 3세는 요새를 건설했고 충성을 사기 위해 씨족의 족장들에게 돈을 주었다. 그런 뒤에 충성의 맹세를 요구했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윌리엄 3세의 위협을 받은 족장들은 쫓겨난 왕 제임스 2세에게 윌리엄 3세의 요구대로 충성을 맹세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제임스 2세는 처음에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왕위를 되찾을 생각에 머뭇거렸다가 그 가능상이 사라지자 윌리엄 3세에게 충서을 맹세해도 좋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전갈은 윌리엄 3세가 제시한 시한인 1692년 1월 1일을 몇 주 남겨놓지 않고 도착하여 몇몇 족장은 간신히 날짜를 맞추었으나 넘긴 경우도 있었다. 글렌코의.. 이전 1 ··· 18 19 20 21 22 23 24 ··· 4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