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배반한 살인 글렌코 학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 윌리엄 3세를 여러 방식으로 통제하려 했다. 윌리엄 3세는 요새를 건설했고 충성을 사기 위해 씨족의 족장들에게 돈을 주었다. 그런 뒤에 충성의 맹세를 요구했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윌리엄 3세의 위협을 받은 족장들은 쫓겨난 왕 제임스 2세에게 윌리엄 3세의 요구대로 충성을 맹세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제임스 2세는 처음에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왕위를 되찾을 생각에 머뭇거렸다가 그 가능상이 사라지자 윌리엄 3세에게 충서을 맹세해도 좋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전갈은 윌리엄 3세가 제시한 시한인 1692년 1월 1일을 몇 주 남겨놓지 않고 도착하여 몇몇 족장은 간신히 날짜를 맞추었으나 넘긴 경우도 있었다. 글렌코의 맥도널드 가문 12대 족장인 매클레인은 하루 전에야 출발했고 5일이 지난 뒤 아가일의 셰리프 콜린캠벨을 만나 맹세가 유효함을 인정 받았다.
그런데 롤랜즈의 스테어하우스에서 출생한 스코틀랜드 담당 대신이었던 존 달림플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통합되기를 바랐고 이에 방해가 되는 하일랜즈인들을 싫어했다. 재커바이트 족장들이 맹세를 했다는 사실에 실망한 달림플은 매클레인의 맹세가 규칙에 어긋난다며 윌리엄 3세를 설득하여 글렌코의 맥도널드 가문을 멸족 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냈다.
1692년 1월 말 혼인으로 맥도널드 가문과 연결된 로버트 캠벨중대장이 지휘하는 아가일 백작 보병연대 제 1중대와 제2중대 약 120명은 징세를 위해 맥도널드 가문의 마을에 숙박했고, 맥도널드 가문은 하일랜즈의 전통에 따라 병사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2월 12일 드러먼드 대위가 은밀히 멸족 명령을 받아 도착했다. 이튿날 매클레인을 비롯하여 38명의 남자가 집에서 또는 도피하려다 살해 됐으며, 가옥이 불탄 뒤 추위를 피하지 못한 여인과 아이 40명이 죽었다.
여러 병사가 자신들을 환대한 주민들에게 위험을 알리려 했고 2명의 장교는 명령을 거부했다. 매클레인의 아들들은 탈출에 성공했다. 글렌코의 학살은 스코틀랜드에서 다른 살인보다 더 극악한 범죄로 여기는 '믿음을 배반한 살인'이어서 비난이 거셋다.
국왕도 직접 명령서에 서명했기에 책임을 면할 수 없었으나 관련자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