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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1926년 스페인 갈리시아에서 이민온 한 지주의 아들로 비론이라 하는 쿠바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주라는 배경답게 중산층 이상은 되는 집안이었고 고등 교육을 받았다. 학창 시절 공부보다는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나 야구에 열광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하바나 법대에 들어가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처음으로 학생 운도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유주의와 반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다. 공부는 딱히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토론하는 것과 웅변의 대가라서 순식간에 학생 운도의 구심점이 되었다고 한다. 1953년에 쿠바의 군사 독재 정권이자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바티스타 정권을 습격하기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면서 이름을 알린 혁명가다. 비록 습격 작전은 실패했지만 "역사가 나의 ..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도 연관이 많다. 당시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국은 당시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중 제2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베트남에 파병하려고 했었다. 미군이 빠져나가 전력에 공백이 생겨 벌어질 북한의 침공이 두려웠던 박정희 정부는 미군 측에 먼저"우리가 너네 대신 병력을 보내줄께!라고 제안을 하게 된다. 미국이 이를 승낙하여 우리나라도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육군 9사단(백마부대)를 파견한다. 원래 처음에는 육군 수도사단만 보내려고 했는데 해병대 측이 참전 의사를 강하게 표명한 데다가 파월 사령관 채명신이 해병대도 전투 경험을 갖게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상부에 건의해서 해병대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9사단의 추가 파병은 미국의 요청..
인천상륙작전 왜 인천이였나. 인천상륙작전은 왜 인천이였나 6.25 전쟁의 판도를 뒤엎고 대한민국을 구해낸 작전이자 세계의 유명 작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전 코드네임은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보안 유지에 특히 신경쓰고자 작전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들 중 크롬광석에서 따와 지었다. 작전 후에는 인천전투로 불리고 있다. 인천시의 현용 영자 표기인 Incheon이 아니라 당시 표기였던 Inchon을 사용했다. 부산 교두보 전투의 영어 표기가 Battle of Perimeter인 것처럼 6.25 전쟁 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잔적 2차대전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미드웨이해전과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미군은 이 전쟁에 참전한 후에도 계속 조선인민군에게 연패하고 피해를 내며 경상도까지..
청산리 전투의 진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일제의 대만주 탄압도 점차 강경해져 갔다. 이 과정에서 1920년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패배한 일제는 10월에 훈춘 사건을 일으켜 이것을 병력 진입 구실로 삼고서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도 한 일면, 1920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잠시 머무르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소련 적군과 적배내전의 휴전 협정이 성립된 이후 잉여 무기를 서둘러 매가하려 들고 있었는데, 마침 독립군은 독립 선언 후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가 보관하던 무기를 북로 군정서에 판매하게 되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방중에 이뤄졌고 동년 7월 독립군은 체..
김재규의 대한 부정론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결국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투쟁속에서 벌인것 이라는 해석이 있다. 2004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김재규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대해서 격분했다는 증언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흘러나온 바 있다. 이런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민주화 운운하는 것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 글가 차지철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비해 보았을때 상대적으로 온건성향으로 비쳐질 따름일뿐 그역시도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유신정권의 크게 3..
김재규의 대한 긍정론 김재규는 정권 내에서 온건파였고, 당시 부마항재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는 먼저 이승만과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지시했고 차지철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거론하며 아부를 하여 무력사용을 부추겼다. 결국 대통령인 박정희가 직접 유혈진압을 지시한 이상, 김재규가 10.26 사건으로 박정희를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부마 항쟁 때 5.18 민주화운동이나 천안문 6.4 항쟁처럼 사격명령이 동반된 진압이나 심각한 경우 차지철 말대로 킬링 필드급 학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차지철이 킬링필드같은 개소리를 지껄여도 박정희가 저지하지 않은 점은 김재규나 차지철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학살을 묵인하겠다는 암시로 해석 될 수 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 보충서를 보면, 김재규는 부마항쟁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하게 반응..
박정희 암살의 김재규 그는 영웅인가?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쯤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 등르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김재규 고향은 경북 선산군 출생으로 현대의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선사읍 이문리 . 이문리에는 김재규의 생각가 아직도 남아 있다. 김재규의 아버지는 정미소를 운영했고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것은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 진다.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 하였다. 국내 웹상에서 김재규가 일본해군 출신이란 잘못된 정보가 퍼져있는데 그는 일본국 특별 간부 후보생 출신으로 이는 해..
5공화국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으로 부터 노태우 대통령 취임까지의 시기를 우리는 5공화국이라 한다. 사실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에 이미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이건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은 것이고, 이른바 체육관 선거 시즌 투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 제5공화국의 시작이라 할수있다. 물론 체육관 선거 시즌 1과 시즌2의 대통령은 동일 인물이다. 1981년 3월 3일부터 1988년 2월 24일까지 2550일간 지속되었던 독재 시대 .분명히 시대상으로는 경제 발전과 물가 안정으로 인한 생활수준의 향상과 기술 발전 등의 엄청난 혜택이 있었던 시대였지만 , 그 전보다 더 악랄하고 듣도보도 못했던 사건들이 일어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