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스페인 갈리시아에서 이민온 한 지주의 아들로 비론이라 하는 쿠바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주라는 배경답게 중산층 이상은 되는 집안이었고 고등 교육을 받았다. 학창 시절 공부보다는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나 야구에 열광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하바나 법대에 들어가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처음으로 학생 운도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유주의와 반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다. 공부는 딱히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토론하는 것과 웅변의 대가라서 순식간에 학생 운도의 구심점이 되었다고 한다.
1953년에 쿠바의 군사 독재 정권이자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바티스타 정권을 습격하기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면서 이름을 알린 혁명가다. 비록 습격 작전은 실패했지만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 "라는 명언을 통해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한 사건은 그의 이름을 오히려 드높였다. 2년후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부가 특별사면을 행하자 멕시코로 망명해 유명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인 체 게바라 같은 중남미 해방운동 세력을 흡수하여 쿠바에 재상륙하여 많은 고난을 극복했다. 결국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한 1956년에 내각 책임제의 총리로 취임하면서 쿠바 혁명을 성공 시켰다. 쿠바혁명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무조건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펴러고 했던것은 아니었고, 의이로 상당수 우파인사들도 혁명에 동참한 덕택에 자리를 얻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도 초기에는 피델 정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지개혁과 미국기업들에 대한 대규모 국유화 조치로 인해서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히 틀어지기 시작했고, 거기에 더해서 체 게바라 등 사회주의자들을 주요요직에 등용하기 시작하자,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쿠바를 견제하기 시작 했으며 피델은 소련과 손을 잡으면서 미국과 완전히 척을 지게되었고 이후로 독재자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김일성과 달리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에게도 자식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권력을 세습시키지는 않았다. 동생인 라울에게 권력을 넘기긴 했다지만, 라울도 형의 후광이 아니라 피델 다음가는 쿠바 혁명의 주요 인물인 소위 말하는 개국공신이었기에 권력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쿠바 혁명 때 주로 참모역으로 활동하느라 체 게바라에게 묻혀서 그렇지 그래도 혁명직후에도 평의회 부의장으로 쿠바 권력순위2~3 순위에 위치한 인물이 라울이었고, 체게바라 사후에는 완전히 2인자 자리를 굳혔다. 비슷한 예로 옛날 중국 송나라의 송태조가 송태종 형제 정도의 권력 관계에 더 가깝지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 세습과는 전혀 다르다. 만약 체 게바라가 남아 있었으면 체게바라에게 승계 되었을거라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라울의 나이가 80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쿠쿠바는 곧 혁명 이후의 세대에게 권력이 이양될 것으로 보는 전망이 우세핟하다. 그리고 라울의 성향을 피델과 비교해 보면 북쪽의 세습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꽤나 센세이셔널한 일이다. 그리고 2018년에 라울도 물러나면서 카스트로 가문의 세습은 끝났다. 흔히 쿠바 혁명이라고 하면 피델 카스트로아 체 게바라가 주역이라고 생각하지만 , 이는 워낙 체의 명성이 높아서 생긴 오해이다. 라울 카스트로는 피델과 함께 쿠바 혁명 계획을 시작할 때부터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오히려 체는 그란마호 상륙 작전 당시 공산 게릴라군의 의사가 오직 체 밖에 없어서 군의관으로 탑승한 것이며, 후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대민지원을 하며 거점을 세울 때 체의 의료 대민봉사지원이 눈부신 성과를 나타내어 주도적 위치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체 게바라가 유독 많이 알려진 이유는 체가 인간적인 매력과 성품, 교양을 바탕으로 서구 지식인들에게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쿠바 혁명 이후 요직에 앉아서 편히 살수 있었던걸 포기하고, 볼리비아에서 혁명하다 법적 절차도 무시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등 간단히 말해 체의 모습이 당시 서양의 좌파 지식인들이 꿈꾸던 사회주의 혁명가의 모습에 부합했기 때문에 체가 크게 알려진것 이다. 그리고 그의 외모역시 한몫한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만큼 아이콘으로 부상 되었고 소련이 국제 공산당의 중심으로서 서구 좌파 학생들에게 이상형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스탈린이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폭로와 더불어 소련군이 무력으로 헝가리 봉기와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렸고 소련에 대한 동경도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이때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신좌파의 발흥과 함께 그 공백을 채우고 부상한 것이 호치민,마오쩌둥, 체게바라,그리고 피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