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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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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한국과도 연관이 많다. 당시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국은 당시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중 제2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베트남에 파병하려고 했었다. 미군이 빠져나가 전력에 공백이 생겨 벌어질 북한의 침공이 두려웠던 박정희 정부는 미군 측에 먼저"우리가 너네 대신 병력을 보내줄께!라고 제안을 하게 된다. 미국이 이를 승낙하여 우리나라도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육군 9사단(백마부대)를 파견한다. 원래 처음에는 육군 수도사단만 보내려고 했는데 해병대 측이 참전 의사를 강하게 표명한 데다가 파월 사령관 채명신이 해병대도 전투 경험을 갖게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상부에 건의해서 해병대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9사단의 추가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게 5만 병력 규모의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56만 3387건의 작전을 수행했다.

참고로 북한도 비밀리에 베트남 전쟁에 파병한 적이 있다. 전투기 조종사 및 정비병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공군 부대 위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북베트남 공군에 소속되어서 활동했다.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보급과 수당 면에서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으며, 비슷한 경제사정이었던 태국군보다도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9대 1을 쌈사먹는 25대1의 사상자 교환 비율을 비롯하여 파병 한국군의 전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전쟁 후반기의 작전에는 100대의 1의 교환비를 보여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베트콩 및 북베트남 내부에서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경우 절대로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 정황도 꽤 되며 한국군의 용맹함은 동매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다. 장비나 신체조건 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정반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군이 잘 싸운 이유로는 첫째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 많은 준비를 해서 갔고, 둘째로 해방 이후부터 빨치산 토벌 등으로 대게릴라 전투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군은 참전긱기간 중 대민진료 352만 3364명, 식량1만 9640톤,의류46만 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량132개, 도로394km,태권도 보급 90만2060명 ,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 연예공연2304회 등 평정사업과 동시에 많은 대민 사업을 펼쳤다.

한국군은 원래 구식 무기인 M1개런드를 들고 있었으나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한 끝에 미군이 막 보급받던 M16 소총을 약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 몇 년이 지나고 나서는 전군이 M16등의 신예 미군 병기로 무장 하였다. 따라서 병사 개개인의 화력에서도 미군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령관의 제대로 된 지휘 덕에 지구방위대 미군보다도 오히려 더 잘 싸우는 이상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사실 초창기에는 미군의 헬리콥터나 포병지원을 잘 안 해준 데다 한국군에게 주둔지역을 넘기고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나와서 꽤 어려움을 겪은 면이 있다. 특히 전쟁 초창기, 해병 청룡부대의 첫 대규모 작전 "청룡1호" 작전이나 맹호부대의 "비호6호" 작전은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이 었다. 특히 "청룡1호"작전은 투이호아의 혼바산 등의 험난한 산악전을 벌여야 했고 고지나 산 속에 숨어있는 베트콩 기지들을 산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자 미군들이 대대적으로 지원을 해주기 시작한다. 후반 작전들에서는 미군의 헬리콥터 지원으로 바로 고지나 높은 지역에서 투입하여 위에서 치고 내려오고 밑에서도 동시에 치고 올라오며 적을 포위시켜 섬멸 하면서 더욱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주월 한국군은 게릴 소탕, 대민지원, 연내수비 등의 임무가 많았다. 따라서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부수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수 있다. 하지만 사실 게릴라 소탕이라고 하는게 헬길 공중강습하고, 미군의 강력한 화력지원에다 포위망도 갖춘 정교하고 대대적인 작전인데다가 영내수비란 것도 따지고 보면 두코 전투나 짜빈동 전투처럼 스케일이 크기도 하다.

또한 본래 점령전이 아닌 베트남에서는 전장 환경상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특수부대의 월경 작전도 따지고 보면 정규전을 치르려는게 아니라 게릴라 활동을 차단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구정 공세도 게릴라전의 스케일이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고, 케산 전투도 영내수비가 엄청나게 큰 판으로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군은 베트콩 이외에도 두코전투, 안케패스 전투나 짜빈동 전투 등 월맹 정규군과 여러차례 교전한 끝에 전과를 올림으로써 실제 정규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냈다. 그 외에도 주월 한국군은 독수리 70-1호 작전, 백호 9-12호 작전, 홍길동 작전 등 월맹 정규군과 주월 한국군이 전투를 치른 사례가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짜빈동 전투'는 국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라 할수 있다. 따라서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환경 속에서 충분히 자기 가치를 드러냈다고 보면 되겠다. 비록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실제로 그 지원을 토대로 승전을 거두었지만 어디까지나 전투를 치르는 주체는 한국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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