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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왜 인천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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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은 왜 인천이였나

 

 

 

6.25 전쟁의 판도를 뒤엎고 대한민국을 구해낸 작전이자 세계의 유명 작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전 코드네임은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보안 유지에 특히 신경쓰고자 작전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들 중 크롬광석에서 따와 지었다. 작전 후에는 인천전투로 불리고 있다. 인천시의 현용 영자 표기인 Incheon이 아니라 당시 표기였던 Inchon을 사용했다. 부산 교두보 전투의 영어 표기가 Battle of Perimeter인 것처럼

6.25 전쟁 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잔적 2차대전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미드웨이해전과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미군은 이 전쟁에 참전한 후에도 계속 조선인민군에게 연패하고 피해를 내며 경상도까지 밀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는 한 계기가 되었다.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조선인민군은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된다.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당장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타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명이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국군은 UN군의 참전 덕분에 동수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고서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산을 저지선으로 삼을 경우 북한군이 샛길 등으로 산을 쉽게 넘어가서 아군을 역포위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수비를 할때는 적이 보이므로 유리하지만, 역공을 하려면 도강부터 해야하고 적에게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도 쉽지 않았고, 국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려 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국군 및 UN군은 마땅히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실제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을 시작할 경우 ,38선까지 도달하는데만 10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기간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지경이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수 있는 적 후방으로의 상륙작전을 원했다. 본인의 산하 육군과 해병대가 2차대전에서 상륙작전을 통해서 승리한 주역이자 그 경험에 비춰봤을때 개구리 뜀뛰기 작전처럼 적을 고립시킬 작전이 필요했다. 이는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 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이제히 총붕괴될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었다.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보급을 위해 사용한 육상 교통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따라서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까지 진격할 경우 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덤으로 한국지형의 특성상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 등의 중장비는 몽땅 버리고 사람만 빠져나오기도 힘든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에 잘하면 단번에 쳐들어온 조선인민군을 몽땅 제거할수 있는 기회도 만들수 있었다.

인천이 이렇게 상륙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지로 결정된 이유는 일단 인천 이외에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적 후방의 완전 단절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군산시의 경우 상륙하기는 양호하나 보급선을 하나도 절단하지 못하는 데다가, 적의 병력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한다. 이런곳에 상륙하느니 해당 병력을 부산으로 증원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난 지 오래였고 평양 이남의 남포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이 지역은 적의 수도 바로 턱 밑이므로 방어가 튼튼한 데다가 결정적으로 원산-서울-낙동강 보급선은 막지 못하는 것으로 예상됐다.

포승면은 현 평택시 포승읍을 말한다.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조수간간만의 차를 자랑하는 아산만 유역이다. 그나마 수도에서 정서방에 다다르는 인천과는 달리 수도와의 거리도 형편없이 먼 데다 조수 간만의 차도 극복하기 어려워 한반도 역사 동안 아예 버려진 땅이었다. 오늘날의 평택항의 개발이 이루어진 건 토목 기술 수준이 괄목할 정도로 좋아진 1990년대 이후의 이야기이다. 또한 북한군이 인천항을 폭파해서 못쓰게 만들 시간을 준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장 상륙작전 시는 물론이거니와와, 이후, 북진때도 인천항을 주보급항으로 사용해야만 작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 있었다. 인천이 유일하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배치된 병력이 매우 적을 거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대략 1000명 이내의 병력만이 인천을 지키고 있을것 으로 예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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