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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암살의 김재규 그는 영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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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쯤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 등르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김재규 고향은 경북 선산군 출생으로 현대의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선사읍 이문리 . 이문리에는 김재규의 생각가 아직도 남아 있다. 김재규의 아버지는 정미소를 운영했고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것은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 진다.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 하였다. 국내 웹상에서 김재규가 일본해군 출신이란 잘못된 정보가 퍼져있는데 그는 일본국 특별 간부 후보생 출신으로 이는 해군 휘하의 간부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육군에서 운용하던 프로그램이었다. 즉, 김재규는 일본군 유군 출신이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이때 동기생으로 입교한 박정희와 인연을 맺는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때 박정희가 사단자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1946년 12월 196명 중 14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경비대 참위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동하였다가 면직된 후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후 복직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3사단 22연대 제2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여 의정부,대구,영덕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엻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북진의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깢까지 밟았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한 후 여수 제2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고,5.19 군사정변 당시에는 총무과정으로 있었는데 쿠데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며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1.21사태 후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193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을으로 전보되었다. 

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때문에 한계령에 건설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부분이 삭제 당했다 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사건 직후 그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 장군은 삭제되어 있다.1973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후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다. 이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 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 정보부장에 취임 하였다. 

 

 

민주화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함세웅 신부의 재평가 주장을 비롯하여 시사in등의 일부 언론과 문영심 작가, 김재규를 변호했던 안동일 변호사 , 천정배 의원 등이 김재규 재평가에 힘을 실어줬고, 공화국 시리즈 등 드라마에서도 비교적 호의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또월간지 신동아 1996년 10월호에선 김재규를 특집기사로 다루었고, 최후진술이 담긴 육성테이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신동아 독자들에 의한 재평가 여론이 일었다. 당시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듣고 감동받은 많은 독자들이 신동아의 편집실로 전화하여 김재규를 그동안 잘못 알았다.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허나 당시는 박정희신드롬이 점점 떠오르던 시기라 김재규의 재평가 여론은 금세 묻히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재평가 흐름에 정점을 찍게 만든 것이 바로 2016년 말에 벌어진 한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였다. 1970~80년대 독재 정권에서나 일어날 법한 박근혜의 후안무치한 행각과 헌법부정으로 인해 퇴진운동이 불붙으며 자연스럽게 그 아버지인 박정희와 그의 독재정권을 종결시킨 김재규에 대한 관심도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비록 그의 암살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주장은 있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이 박정희의 절대권력을 깨부순 것은 사실이며, 이전부터 보여온 친미주화적 행각이 대중들 사이에서 조명 받으며 재평가 움직임은 재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낙나갔다. 단순히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박정희 독재를 종결한 것이 재평가 받은게 아니라 생전에도 존졍받을만한 많은 언행 특히 도재줭권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민주세력들을 배렿려하는 행동, 사형 직전까지 재판에서 보여준 평소 신념에 대한 논리정연함 등이 재조명 받으면서 "권력 투쟁이 아닌 진심으로 시민과 민주주의를 생각한 거사"로 뒤바뀐 평강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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