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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어린이"라는 말을 만든 독립운동가 방정환 어린이날 "어린이"라는 말을 만든 독립운동가 방정환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 아동문학가이다.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이며, 어린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1899년 11월 9일 한성부 서부 적선방 야주현계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했다. 게다가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었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여,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에만 몰두했다. 7살 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다. 보성소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
조선시대 소시오패스 임해군 조선시대 소시오패스 임해군 조선의 왕족으로 , 선조의 저장자이다. 공빈 김씨의 아들로, 광해군의 동복형이다. 이복 남동생들인 정원군, 순화군과 더불어 선조의 아들들 중 개막장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롭던 시기에 세자가 되지 못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 전기 양녕대군도 저리 가라 할 수준으로 패악이 극에 달했던 막장 왕족이다. 이 성격 개차반의 예를 보여주는 사건이 전란 중 이복 남동생 순화군과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국경인과 국세필이 왜군의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 임해군과 순화군을 왜군에게 넘겨버렸다. 이후 포로 협상으로 풀려나지만 , 안 그래도 막장이었던 성격이 포로 생활 동안 겪은 일 때문인지 더더욱 막장이 되어버려서 민가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등 엄청..
악녀중에 베스트 오브 베스트 달기 악녀중에 베스트 오브 베스트 달기 각종 사서의 기술이 제법 엇갈리는 편이지만, 화술에 능하고 기교가 극에 달하여 주 천자의 애를 태우는 데 능숙했다는 것이 공통 시각이다. 사실 그녀는 포락 같은 형벌을 스스로 만들어낼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포정치를 펼치고 주지육림을 만들면서 세금을 올리고 향락에 빠져 살던 것은 본인이 아닌 주 천자다. 비간은 당시 성인이란 소리를 듣자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7개라 던데"라며 직접 확인해 보자고 부추겼다고 하니 참으로 고어하다 죄인을 숯불 위에 기름을 듬뿍 발라 달궈지고 있는 구리 원통 위를 걷게 했다는 포락지형까지 시행했으며, 열이면 열 그대로 기둥에서 미끄러져 숯불로 낙하, 그리고 주 천자와 달기는 그렇게 끔살당하는 모습을 박장대소하면서 관람했다고 한다. 그..
금수저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형제들... 금수저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형제들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호는 우당 본관은 경주 이씨.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직계 10대손이다.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의 6형제 중 넷째, 바로 아래 동생이 바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조선 후기에 애국 계몽 운동을 벌였으며, 신민회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훗날 민주 독립 기지 건설과 연관이 된다. 이화영의 며느리는 고종의 하나밖에 없는 누님의 외동딸, 즉 고종의 조카딸이다. 또한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누이 동생을 친정으로 불러들인 뒤, 급사했다고 속이고 개가시키기도 했다. 조선 시대 여성의 덕목은 첫째도 둘째도 부군에 대한 절개이고 특히나 반가의 규수라면 이러한 잣대는 더욱 엄격했다. 하물며 명문가 중 명문가였..
조선의 비운의 옹주 효정옹주와 여종 풍가이 조선의 비운의 옹주 효정옹주와 여종 풍가이 조선의 공주의 신분이지만 불행한 삶을 살다 결국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여인 효정옹주 조선 제 11대왕 중종의 차녀로 태어나 중종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중종26년 조의정과 결혼 한다. 어릴때 친모를 잃은 옹주를 가여이 여겨 호화로운 결혼식 치뤄 주었으며, 당시 나라가 혼란한 상황에서도 옹주의 신혼집을 짓는등 자식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준다. 그런 효정옹주의 남편은 안타깝게 인성이 아주 나빳으며 욕심이 많아 부마가 된후 재산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중종의 훈계에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행동을 보였다. 옹주가 시집을 가도 왕의 자식이므로 남편뿐만 아니라 시댁식구들도 공대를 해야 하고 아침 문안 인사도 드려야 했지만 조의정은 예법을 무시하고 지..
최영과 이성계의 황산대첩 최영과 이성계의 황산대첩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9월에 미래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사령관으로 있던 고려군이 현 전라북도 남원인 지리산 부근 황산에서 기세가 절정에 오른 왜구 무리와 싸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순서상으로 보면 진포대첩과 사근내역 전투에 이어서 연달아 벌어진 1380년의 대 왜구 전쟁의 종결판으로 볼수있다. 이전투들은 별개의 전투이면서도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 한 항목에서 합쳐서 서술한다. 1380년의 전쟁은 고려 말기를 장식했던 왜구와의 치열한 사투에서 가장 극적인 반격이었는데, 황산 전투의 왜구들은 진포 해전에 상륙했던 500여척의 역대 최대 함대 이외에도 고려의 내륙에 흩어져 있던 왜구들이 집결한 연합 세력이었다. 이때의 왜구들은 가난한 호족들이 집합했..
6.10 민주항쟁 그날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이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그해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이 사건이 은폐,축소된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6월 9일 연새대생이었던 이한열 군이 시위 과정의 부상으로 사경을 헤메게 되면서,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말한다.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포함한 민주체제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 강경 탄압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1987년 1월 당시 서..
4.19혁명 김주열을 기억하라 4.19혁명 김주열을 기억하라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3남2녀 중 차남으로 1944년 10월7일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김주열이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서도 비교적 많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머니 권씨는 경상남도 함양군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김주열의 영남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1956년에는 용지국민학교를, 1960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여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